생태인문학의 확장
생태인문학의 확장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02.27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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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비도 봄비도 아닌 이월의 새벽 비가 내리고 있다. 별도 달도 처마도 울고 있다. 눈물 같은 비에 새벽을 깨우던 옆집 멍멍댁도 우리 집 꼬꼬장도 조용하다. 오늘만큼은 알람도 맘껏 울도록 내버려 뒀다.

우수(雨水)는 봄의 시작이자 겨울의 마무리이다. 마침 일요일이라 우수를 핑계 삼아 백운(白雲), 집청(集淸), 관서(觀逝) 세 곳을 띄엄띄엄 황소걸음으로라도 찾을 양으로 집을 나섰다. 봄은 눈길이 머무는 곳마다 촉촉함과 노란 점, 그리고 새들의 수다로 기지개를 켜고 있다.

백운산 자락에 접어들자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요란하고 시끄럽다. 일행을 환영하는 팡파르로 여기며 가까이 다가서자 순식간에 울음을 그치고 잠잠해진다. 큰 눈으로 눈치라도 보는가 했더니 이리저리 뛰면서 몸을 숨긴다. 사랑의 결실인 개구리 알이 질펀하다. 덮친 놈, 덮치는 놈, 덮친 데 또 덮치는 놈으로 작은 웅덩이는 아수라장을 연상케 한다. 한참을 오르는 도중에는 딱새의 청아한 노래와 멧새의 수줍은 웃음이 내내 길잡이 역할을 자청한다.

탑골샘에 도착하니 ‘원천(原泉)’이라는 이름의 친구가 반갑게 맞이해준다. 원천은 부지런함이 몸에 배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혼혼(混混)의 노래를 부르며 사는 친구다. 그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거슬러 오르는 것은 모르고, 낮은 곳만 찾는다. 해발 901m 백운산의 빗물은 울산 태화강, 경주 형산강, 낙동강으로 갈라져 흐른다는 설명이 정겹다.

원천과 일행은 집청정(集淸亭)에서 반구(盤龜)를 마주하며 만난다. 때마침 탁목조(啄木鳥)는 나무 쪼기를 멈추고 이리저리 몸을 숨기면서 자기 영역을 알린다. 원천은 집청의 자리에 머무는 동안 온전한 것과 화목, 관용과 겸손에다 편견과 거짓까지 일깨워준다. 집청(集淸)은 맑음이 모이는 곳이지만 과언무환(寡言無患=말이 적으면 근심거리가 없다)을 배우는 곳이면서 세속적·감각적·부정적인 것들을 잠시 내려놓는 곳이기도 하다.

대방골 관서정(觀逝亭)을 찾아 발길을 옮긴다. 현재 정자는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그러나 관서정의 관서는 그냥 읽고 지나갈 것이 아니다. 마음속 깊이 생각하며 그 의미를 되새겨야 할 정자 이름이다. 관서(觀逝)는 시간이나 물처럼 흘러가는 것을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비슷한 사례로 논어의 자한(子罕)에는 “공자가 강가에서 말씀하셨다. 흘러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밤낮으로 쉬지 않는구나(子在川上曰/ 逝者如斯夫/ 不舍晝夜).”라는 구절이 있다.

원천은 대곡댐을 가득 채우듯 사연댐도 가득 채운다. 다시 대곡의 끝자락 무학산 세 봉우리 아래 곡연을 채우며, 넓내가 이어지는 큰 여울 사일(泗日)로 흘러들어 태화의 물로 변한다. 용왕소, 삼형제바위, 망성, 욱곡을 차례로 뒤로하며 선바위 백용담에 당도한다. 웃 서답천, 아래 서답천을 막 도는 순간 천상지탄(川上之嘆)과 백천을 만난다. 원천은 구영, 낙안소, 사군탄, 해연, 삼호를 지나고 다시 태화교, 학성교, 명촌교를 지나 기수역을 거쳐 사해의 바다로 들어간다.

필가 이번 나들이에서 얻은 느낌이지만 울산만이 갖는 ‘대곡천 생태 인문학’의 확장을 제언한다. 사실 지금까지는 대곡의 문화를 한시(漢詩) 해석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다. 이제는 조감(鳥瞰)으로 생태와 함께하는 울산만의 독창적 생태 인문학으로 확대·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이번 나들이에 함께한 ‘원천’은 맹자(孟子)의 이루하(離婁下)에 나오는 말이다. “원천은 밤낮으로 쉼 없이 흘러 웅덩이마다 채운 후에 앞으로 나아가 이윽고 사해(四海)에 이른다(原泉混混 不舍晝夜 盈科而後進 放乎四海 如本者如是).”

김성수 울산학춤보존회 고문, 조류생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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