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퍼스트 슬램덩크 - 전설, 에이스 윤대협, 그리고 청춘
더 퍼스트 슬램덩크 - 전설, 에이스 윤대협, 그리고 청춘
  • 이상길 취재1부 차장
  • 승인 2023.01.12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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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만화 <슬램덩크>는 나 같은 찐덕후(찐팬)들에겐 사실상 한국 만화나 다름없다. 그게 그럴 수밖에 없는 건 바로 등장인물들의 한국 이름 때문인데 주인공인 강백호는 강백호처럼 생겼고, 서태웅도 서태웅처럼 생겼으며, 송태섭 역시 송태섭처럼 생겼다. 같은 북산고 팀원인 정대만과 채치수나 심지어 상양이나 해남, 풍전, 산왕공고 등 북산고와 붙었던 다른 학교 농구부 선수들도 그건 마찬가지. 정말이지 역대급 작명센스가 아닐 수 없다. 뭐? 강백호가 사쿠라기 하나미치? 서태웅이 루카와 카에데? 안 어울려, 안 어울려.

이런 <슬램덩크>는 90년대 전반기를 풍미했던 전설의 농구만화지만 내 또래라면 많은 이들로부터 아직까지도 ‘인생작 만화 1순위’로 손꼽히고 있다. 그건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재미도 재미지만 땀으로 범벅이 된 농구코트에서 쏟아지는 주옥같은 명대사들이 마흔을 훌쩍 넘긴 아직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파릇파릇한 20대 시절 처음 책장을 넘길 땐 북산고의 승리를 응원하며 그 많은 명대사들을 곱씹었겠지만 이젠 자신의 삶이 그때 그 농구코트였음을 다들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을 터. “농구, 좋아하세요?”부터 “포기하는 순간 시합은 종료야”, “난 팀의 주역이 아니라도 좋다”, “이제 내겐 링밖에 보이지 않아”,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구요”,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국가대표 때인가요? 난 지금입니다”, “왼손은 거들 뿐” 등등 비록 고등학교생들 간의 시합이었지만 그때 그 농구코트 안은 살다보면 저절로 깨닫게 되는 삶의 정수(精髓)들로 넘쳐났었다.

헌데 독특한 척하는 게 아니라 지금의 내가 <슬램덩크>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는 의외로 농구코트 안에 없다.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 역시 메인인 북산고 멤버가 아니다. 바로 능남고의 ‘윤대협’인데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제, 슬슬 가볼까”라는 대사가 지금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사실 <슬램덩크>에서 윤대협이라는 캐릭터는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 클라스(급)가 조금 남다른 면이 있다. 그는 천재적인 농구 센스를 지닌 능남고의 에이스지만 직접 골을 넣는 것보다는 패스를 즐겨했다. 그러다 팀이 패배 위기에 놓였을 땐 엄청난 득점력으로 좌중을 압도했는데 그 때문에 팀원들 사이에선 늘 ‘윤대협이라면 뭔가 해줄 거야’라는 기대감이 존재했었다.

하지만 윤대협의 진짜 매력은 치열한 농구코트 안에서도 농구코트 밖을 볼 줄 안다는 것. 그러니까 그는 승부보다는 경기 자체를 즐길 줄 알았다. 한 장 남은 전국대회 진출권을 놓고 북산고와 치열한 승부 끝에 패배한 능남고. 그런데 윤대협은 다음 날 태연하게 낚시터에서 낚시를 했다. 그리고 어제의 패배가 마치 아무 일 아니라는 듯 하품을 크게 한 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슬슬 가볼까..!”

사실 그렇다. 1등이나 우승을 하려면 그 목표만을 바라보면서 남들보다 빨리 가야만 한다. 워낙 경쟁이 치열한 만큼 슬슬 가선 안 된다. 허나 그렇게 빨리 가다 보면 주변 풍경은 다 놓치기 마련. 팀원들과 함께 승리를 강렬히 염원했지만 빨리 가는 것의 단점도 알았던 윤대협이었기에 직접 골을 넣는 것보다는 패스를 즐겨 했던 게 아닐까. 그쪽이 더 재밌으니까. 이런 윤대협의 ‘여유’가 눈에 크게 들어오기 시작한 건 소싯적 꿈이나 목표와는 이미 많이 멀어진 서른 즈음. 항상 승리할 순 없으니 졌다고 강백호나 서태웅처럼 억지로 분을 삭히며 설욕을 다지기보다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낚시를 하는 윤대협이 훨씬 멋있게 보였던 것 같다. 한때 서태웅을 좋아했던 남자는 본능적으로 그렇게 윤대협으로 갈아타게 됐던 거다. 조금이라도 덜 아프기 위해. 그쪽이 좀 더 행복할 거 같으니까.

만화책이 완결된 지 26년 만에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봤던 그날, 북산고 팀원들이 작가인 타케이코 이노우에의 펜 터치를 통해 하나씩 하나씩 등장하는 첫 장면에서부터 눈시울이 불거지고 심장이 쿵쾅거리더라. 그건 그날 나와 같은 상영관에 있었던 다른 이들도 비슷했을 것. 내 또래가 특히 많아 보였는데 가버린 청춘을 26년만에 애니메이션으로 확인하면서 간혹 훌쩍거리는 이들도 보였다.

단 1초라도 나오길 간절히 바랐던 윤대협은 끝내 등장하지 않았지만 ‘북산고 VS 산왕공고’ 전을 2시간 분량으로 제작한 만큼 만화책 그대로 마지막 1분여 동안의 경기는 대사나 배경음악 일체 없이 적막 속에서 상영관 스피커로 오로지 심장소리만 쿵쾅거렸다. 그 심장소리는 마치 내 청춘의 소리처럼 들렸는데 그 순간, ‘이 영화, 그 시절을 <슬램덩크>라는 만화책과 함께 보낸 청춘들에게 보내는 타케이코 이노우에의 선물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때 그 청춘도 ‘선물’이었다는 걸, 그 시절엔 왜 몰랐을까.

원래는 집에 오리지날 버전의 <슬램덩크> 만화책 1~31권이 다 있었다. 하지만 책장들이 낡기도 하고 다시 볼 일이 있을까 싶어 몇 해 전 다 갖다버리고 말았다. 해서 그날 밤, 영화관을 빠져나와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내내 이렇게 되뇌였다. ‘미쳤지, 미쳤어..’ 2023년 1월 4일 개봉. 러닝타임 1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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