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5주년 기획특집]시간을 두드려 인내로 만든 생명의 그릇
[창간 15주년 기획특집]시간을 두드려 인내로 만든 생명의 그릇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2.12.21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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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수도 울산’과 ‘문화수도 전주’가 맞손 잡으면 ⑼ 국가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이형근
국가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이형근.
국가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이형근.

◇유기장 3대 이야기

놋쇠를 다루어 각종 기물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장인을 ‘유기장’이라 한다. 유기장은 전통적인 금속공예기술로서 지역별로 독특한 양상으로 발전하였고, 실용성이 높은 고유의 공예품으로서 그 가치가 인정되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유기그릇 자체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우리 고유의 전통 기술이다. 우리나라 유기의 역사는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되었고, 신라 시대에는 유기를 만드는 국가의 전문기관인 철유전(鐵鍮典)이 있어 일본에 전해지기도 했다. 고려 시대에는 그 기술이 더욱 발전하여 얇고 광택이 아름다운 유기를 만들었다. 그래서 이때의 한국산 유기제품은 외국에 신라동, 고려동이라 해서 귀한 대접을 받았다.

우리 고유의 방짜 기술을 3대째 이어가는 가문이 있다. 이봉주 명예보유자 및 그의 아들인 이형근 유기장 보유자(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이다. 현재 손자와 함께 공방과 유기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이형근 유기장의 부친인 이봉주 장인(96·국가무형문화재 77호 유기장 명예보유자)은 한국전쟁 때 월남하여 고향인 평북 정주군 마산면 청정동 마을에서 익힌 납청유기를 재현했다. 아들 이형근 장인은 2015년 방짜유기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이봉주 유기장 벼름질하기.
이봉주 유기장 벼름질하기.

◇유기에는 비밀이 숨어 있다

유기는 제작 기법에 따라 방짜유기, 주물유기, 반방짜유기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납청유기가 유명한 것은 동과 석을 정확한 비율로 합금하여 두드려서 만드는 전통적인 유기 제작인 방자 기법으로 제작되기 때문이다. 전통적 의미의 놋쇠는 구리 1근(600g)에 주석 4냥 반(약 168.7g)을 배합한 우리나라 특유의 재료라 할 수 있다. 구리에 주석을 10% 이상 섞으면 그 합금이 단단해져 쉽게 깨지기 때문에 그릇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 고유의 유기는 주석을 22%나 섞는데도 그릇으로 성형돼 현재까지도 일상생활에 쓰이고 있다. 우리 고유의 유기가 가능한 것은 ‘담금질’에 비밀이 있다. 담금질을 통해 깨지지 않는 특성을 갖게 하는 것이다.

또한 각 성분의 비율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는데, 구리에 주석을 섞는 비율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기도 한다. 구리와 아연을 합금하여 만든 그릇을 황동(黃銅) 유기라 하며, 노르스름한 빛깔에 은은한 광택이 난다. 구리에 니켈을 합금한 것은 백동(白銅) 유기라 하며 흰빛을 띤다. 구리와 주석을 섞은 청동은 향동(響銅)이라고 하는데 방짜유기는 이것으로 만든다. 황동에 미량 들어있는 불순물이 방짜에는 전혀 들어있지 않은 무독성의 재료이기에 식기 재료로 널리 애용되어왔다. 거기다 항균 능력이 뛰어나 한여름에 음식을 담아 상온에 보관해도 잘 쉬지 않는다.

실제로 실험한 결과, 플라스틱이나 스테인리스 스틸 그릇에 담은 밥은 다 쉬었으나 유기에 담은 밥은 전혀 쉬지 않았다. 2003년에는 식중독균인 O-157균을 스테인리스, 도자기, 유기로 만든 그릇에 동일하게 배양하고 그 경과를 관찰했는데, 유기에서만 균이 검출되지 않았다. 2008년에는 비브리오균이 있는 수족관에 유기를 넣고 실험했는데, 거기서 지낸 어류의 표피나 내장에 균이 검출되지 않았다. 이러한 살균 효과는 구리에 의해 나온다. 방짜유기는 녹인 쇳물로 바둑알같이 둥근 놋쇠 덩어리를 만든 후 여러 명이 망치로 쳐서 그릇의 형태로 만든다. 방짜로는 징이나 꽹과리, 식기, 놋대야, 요강 등을 만들 수 있다.

이렇듯 전통적으로 흔히 사용되던 식기류였지만, 일제강점기 시절 금속공출로 많이 사라졌고 60년대 이후로는 플라스틱, 양은, 스테인리스 스틸 등 새로운 재질이 쏟아져 나오면서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일설에는 연탄 사용이 일반화되면서 유기는 설 자리를 잃었다고 하는데, 유기그릇이 연탄가스에 산화돼 변색되고 녹이 스는 바람에 더 이상 버티지 못했던 탓이라고 한다. 연탄이 아니라도, 전통식대로 만든 유기는 잘 닦고 밀폐 보관하지 않으면 금세 표면에 산화(녹)가 일어나고 변색되는 게 가장 문제라 일상용 식기로 쓰기에는 손이 많이 가는 재질이다.

중요무형문화재 77호 이봉주 명예보유자.
중요무형문화재 77호 이봉주 명예보유자.

◇방짜유기

방짜유기의 비율은 구리 78%, 주석 22%인데, 현대 금속공학에 따르면 주석 비율이 10%를 넘기는 구리합금은 내구성이 떨어진다. 그런데 한국의 유기는 뛰어난 내구성을 갖고 있어 현대 금속공학 법칙을 역행하는 듯 보인다. 한때 산업화를 위해 현대 금속공학 이론대로 주석의 비율을 줄이자 찐득찐득해져 대량생산에 실패했다. 현미경 연구결과, 주물 단계에서 분리됐던 구리와 주석 조직이 망치로 치는 과정에 서로 눌리고 섞여 조직이 치밀해져 내구성이 올라가는 것으로 밝혀졌다.

방짜유기의 기술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터키와 한국이다. 터키의 심벌즈 제조회사인 질디안은 4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세계적인 악기 제조기업이다. 방짜로 소리를 내는 악기로 신라 시대에 바라를 연상하면 된다. 망치로 두들겨서 징을 만들어내고, 기록으로는 악학궤범에 남아 있다. 바라는 단조로 만들어진 신라 시대의 악기로 해인사 명부전 천장 벽화인 주악비천도로 신라의 전통이 1500년을 넘어 해인사 승려 장인의 손끝에 의해 재현되었다.(1873년)

방짜유기 반상기.
방짜유기 반상기.

 

KIST 전통문화산업단의 김긍호 박사는 “유기의 대중화, 명품화, 고기능화하기 위해서 내식성(녹 방지)을 2배, 내변 색성을 5배 향상시키는 것이 목표로 새로운 합금 개발 연구가 진행되고 있고, 고온 연신율도 50% 높이는 목표를 갖고 진행 중이다”라고 밝혔다.

유기의 주성분인 구리 자체는 스테인리스보다 2배 높은 가격이지만 유기그릇제품의 경우에는 비싼 공정 비용으로 인해 스테인리스 스틸보다 10배 비싼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기에 대중화에 한계가 있다. 이런 단점 때문에 국내 유기 시장 규모는 800억원(식기류 300억)이지만 식기 시장 규모는 3천500억원(스테인리스 스틸 제품)으로 식기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 미만이다. 이 연구의 핵심은 녹슬지 않는 유기로서 항균성과 색상에 있다.

방짜유기로 만든 현대적 디자인.
방짜유기로 만든 현대적 디자인.

유기의 장점을 유지하면서 녹슬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새 유기’를 만들어야 한다. 구리와 주석에 카본(탄소)을 1~2% 섞어 유기의 특장점을 완벽하게 갖춘 ‘새롭게 업그레이드된 유기’를 만들 계획이다. 유기그릇은 신라 시대 때부터 쓰였다. 1천500년 동안 살아있는 전통을 미래에도 살아있는 전통으로 만들어야 한다.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전통문화 산업화의 발을 내딛고 있다.

 

 

김동철 ㈜온고대표이사

前한국전통문화전당초대원장

 

 

 

 

한지 콘지 오디오.
한지 콘지 오디오.
해인사 명부전 천장에 새겨진 바라 벽화.
해인사 명부전 천장에 새겨진 바라 벽화.
송광사 대웅전 벽화에 새겨진 바라 비천상.
송광사 대웅전 벽화에 새겨진 바라 비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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