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슈팅 라이크 베컴’ -축구라는 축제
영화 ‘슈팅 라이크 베컴’ -축구라는 축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2.12.01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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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즐겨보는 예능 가운데 <골 때리는 그녀들>이라는 프로가 있다. 여자 연예인들이 팀을 결성해 축구를 하는 건데 평소 여자 축구에 대해선 선입견을 갖고 있던 터라 그런 예능프로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별로 관심을 갖진 않았더랬다. 여자 축구라니. 국내에 여자 축구단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태어나서 TV를 통해 정식 경기를 본 적도 없었으니 당연한 일 아니겠어요? 게다가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남자들의 이야기가 ‘군대에서 축구 찬 이야기’ 아니던가? 아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의 추억으로 요즘은 좀 바뀌었을 수도 있겠다.

뭐, 아무튼 무지 심심했던 어느 날 저녁. 유튜브 알고리즘을 타다 우연히 <골 때리는 그녀들>의 하이라이트 경기 한 편을 보게 됐는데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전문 여자 축구 선수들도 아닌 여자 연예인들로 구성된, 속된 말로 재미삼아 하는 축구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 특히 발라드 가수들로 결성된 ‘FC발라드림’의 에이스 ‘서기’의 플레이를 보면서는 속으로 “미안하다, 몰라봐서”라는 말을 몇 번이나 되뇌였는지 모른다. 그랬다. 비록 미니 축구인 ‘풋살’이었지만 그 속에서 난 영국 프리미어 리그를 봤던 거다. 참고로 메시의 플레이를 닮은 서기의 별명은 ‘리오넬 메기’다.

이렇듯 수준 높은 경기와 남자 못지않은 승리를 향한 그녀들의 무서운 집념으로 인해 그 동안 내가 갖고 있던 여자 축구에 대한 선입견은 완전히 날아가 버렸고, 그렇게 골 때리는 그녀들의 경기를 계속 찾아보다 오래 전 봤던 영화 한 편을 떠올리게 됐다. 바로 2002년 8월에 개봉했던 <슈팅 라이크 베컴>이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이 막을 내린지 불과 2개월 뒤였던 탓에 당시 이 영화는 주목을 안 받을 수가 없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여자 축구를 소재로 하고, 잘생김과 멋진 킥력으로 그해 월드컵 스타 가운데 하나였던 ‘데이빗 베컴’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그가 출연하진 않았다는 점에서 용두사미(龍頭蛇尾)가 되고 말았다. 솔직히 스토리도 살짝 촌스러워 <골 때리는 그녀들>에서 펼쳐지는 현실 경기가 훨씬 더 영화 같다.

그랬거나 말거나 이 영화는 내게 2002년 한일월드컵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로 지금까지 강렬하게 기억되고 있다. 나 역시 그해 6월 닭벼슬 머리가 예술작품처럼 어울렸던 베컴과 폼마저 멋진 그의 솜사탕 킥에 감탄을 금치 못했으니까. 허나 그건 사이드 메뉴일 뿐, 한국 사람으로서 나 역시 한국 축구의 기적적인 행보에 미친 듯이 열광했더랬다. 그랬다. 그건 1004만1천259㏊(대한민국 면적) 규모의 거대한 축제였다. 단군 이래 한반도가 가장 뜨겁고 넓게 행복했던 여름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올라갔으면 내려가야 하고, 좋았으면 안 좋음도 겪어야 하는 게 세상의 이치. 예상은 했지만 2002년 이후로는 그때와 같은 뜨거운 월드컵은 다시 오지 않았다. 2006년 독일 월드컵, 2010년 남아공 월드컵, 2014년 브라질 월드컵, 2018년 러시아 월드컵까지 16년 동안 무려 4차례나 월드컵을 겪었지만 이상하게 끓어오르지가 않더라. 그곳엔 히딩크가 없었고, 경기장을 온통 붉게 물들였던 붉은 악마는 이젠 경기장 한쪽 귀퉁이에서 쓸쓸하게 응원을 하고 있었던 것. 게다가 우리 한국팀이 가끔 2002년 전으로 다시 돌아간 듯한 실력을 보일 때는 2002년이 한낱 꿈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한국 축구가 그렇지 뭐’라고까지 생각했었고, 해서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은 아예 기대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첫 경기인 ‘우루과이’전을 보고는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독일전의 여운을 그대로 간직한 듯한 우리 선수들의 몸놀림을 보고는 한국 축구의 성장을 느꼈던 것. 이어진 ‘가나’전을 보고는 확신했다. 이젠 히딩크가 없어도, 또 경기장을 가득 메운 붉은 악마가 없어도 한국 축구는 언제 어디서든 상대팀을 위협하는 패기 넘치고 박력 있는 축구를 할 거라는 것. 그 모습에서 더 이상 이기고 지는 건 의미가 없더라. 그 실력이면 이기는 건 언제든 할 수 있으니. 오히려 내가 즐길 줄 아는 게 더 중요해지더라. 2002년 이후 20년이라는 시간이 만든 힘이 아닐까 싶다. 한국 축구나 나나 그렇게 내공이 쌓인 거다. 뭐, 그래도 이기면 훨씬 좋겠죠? 그러니 오늘밤(12월 2일) 꼭 16강 가자! 대한민국 파이팅! 우루과이 파이팅! 호날두 우우우.

어머니가 몸이 좀 불편하셔서 평소 일찍 주무시는데 우루과이전이 있던 그날 밤, 난데없이 나를 부르더니 일으켜달라고 하셨다. 축구 봐야 한다면서. 어머니 인생에도 2002년의 추억이 있었던 것. 하지만 몸도 불편하시고 경기가 시작되려면 아직 1시간 넘게 남은 상황이어서 그냥 주무셨는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축구 소식을 물으셨다. 무승부로 끝났다는 이야기와 함께 조금 신기해서 여쭤봤더랬다. “엄마도 축구가 좋아요?” 그러자 이리 말하셨다. “축구 싫어하는 사람 있나?” 이런 게 축구다. ‘축구’라고 쓰고 ‘축제’라고 읽는다. 2002년 8월 30일 개봉. 러닝타임 112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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