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에 찾은 집청정
늦가을에 찾은 집청정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2.11.2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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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해가 중천에 머무를 즈음 가까운 야외로 나섰다. ‘산고곡심무인처(山高谷深無人處)’라는 시구를 음미하며 대곡의 집청정(集淸亭)을 찾았다. 뱁새 무리가 먹이를 찾느라 키 작은 나무 사이로 옮겨갔다.

“추위가 지나면 더위가 오고 더위가 지나면 추위가 오니 추위와 더위가 서로 밀어 일 년이 된다(寒往則暑來, 暑往則寒來, 寒暑相推而歲成焉).” 이를 두고 여시세월(如矢歲月=쏜 화살같이 빨리 지나가는 세월)이라 하던가.

올해도 이미 가을바람이 푸른 잎들을 단풍으로 물들여 이리저리 바닥에 흩어 놓았다. 대나무 그림자는 길바닥의 나뭇잎 모자이크가 안쓰러워 쓸고 또 쓰는 빗질을 계속한다. 시선을 돌리니 금오(金烏)는 대곡담(大谷潭)을 무슨 재주로 뚫었는지 게처럼 엎어져 있다. 한산한 굴뚝새 한 마리가 꽁지를 잔뜩 치켜세우고는 짹짹거리며 강 돌을 징검다리 삼아 건넌다. 때맞추어 백로는 대곡천을 가로질러 날고 말똥가리는 동매산 향로봉 하늘 높이 솟구쳐 풍광을 더해준다.

이윽고 集淸亭(집청정) 석 자가 뚜렷한 편액과 눈이 마주친다. 가운데 집청정 편액과 왼쪽 대치루(對峙樓), 오른쪽 청류헌(聽流軒)이 균형을 잡고 있으니 하나의 건물에 루정헌(樓亭軒)이 함께 있는 모양새다. 집청정은 숙종 39년(1713)에 운암(雲巖) 최신기 선생이 지었다. 선생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혁혁한 공을 세웠던 최진립 장군의 증손이다.

‘집청(集淸)’이란 이름에서 문득 삼청(三淸)과 산청(山淸) 그리고 심청(沈淸)이 떠오른다. 서울 삼청은 계곡물이 맑은 수청(水淸), 숲이 맑은 산청(山淸), 찾는 이의 마음이 맑은 인청(人淸)이다. 경남 산청은 산이 많아 산청이다. 심청은 푸른 바다에 몸을 날렸으니 심청이다. 집청은 무슨 의미로 걸었을까? 좌우의 대치와 청류에서 짐작된다. 산과 마주하고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니 산청과 수청이 만나는 자연이 아닐까 하고….

사족을 그려본다. 집청은 ‘맑음을 모은다’는 기존의 해석도 좋다. 하지만, 필자는 꼬리 짧은 새가 나무에 모이듯 맑음이 만난다고 풀이하고 싶다, 만나면 맑아지는 곳, 맑음이 모이는 곳 등 맑음이 만나는 자연으로 표현하고 싶다. 집청이란 이름에서 착안했다. 배산임수(背山臨水) 풍광 속의 정자가 소승적 공간이라면, 만남의 의미를 탐구하는 집청정은 대승적 공간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집청정 주인 운암은 집청의 의미를 단청(單淸), 삼청, 산청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만나는 다양성을 모두 품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청이 오는 것이 아니라 만나면 청이 되는 곳이다. 그러기에 집청은 결코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현재까지 찾게 하고 만나게 하면서 다양성을 소통으로 녹여낸다.

이러한 이유로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학소대(鶴巢臺)의 학, 반구대(盤龜臺)의 거북, 포은대(圃隱臺)·유선대(遊仙臺)의 바둑두는 신선, 관어대(觀魚臺)의 물고기, 백석청탄(白石淸灘)에 내려앉는 백로(白鷺), 옥천선동(玉泉仙洞), 완화계(浣花溪)와 같은 다양성이다. 주변의 물소리, 바람 소리, 새소리를 만나 자연에서 보고, 듣고, 배울 수가 있어서 자연적으로 집청이 된다.

사람의 키가 큰지 작은지를 알려면 물에 들어가면 확실해지듯 대곡의 집청정을 찾으면 울산 집단지성의 초석 공간임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기에 ‘운암 최신기’라는 이름은 결코 까닭 없이 헛되이 전해진 것이 아니다. 309년의 세월 동안 그저 소개나 하고 건물을 구경하는 것에 머무르지 말고 제대로 보여줄 수 있게 하여 현재에도 활용해야 한다. 깨달음이 새로운 것이 아니듯 곁에 혹은 속에 이미 있었던 것을 재인식하여 가치를 알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창조된 것에서도 다양성은 생각과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이제부터라도 집청정의 가치를 재인식하여 자연과 인문학 그리고 생태의 활용방안을 확대·발전시켜 나간다면 ‘머물고 싶은 일등 문화관광 도시 울산’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김성수 울산학춤보존회 고문, 조류생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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