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5주년 기획특집]전통-현대 아우르는 목공예의 정수 ‘소목장’
[창간 15주년 기획특집]전통-현대 아우르는 목공예의 정수 ‘소목장’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2.11.23 22: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산업수도 울산’과 ‘문화수도 전주’가 맞손 잡으면
⑸국가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소병진
나무 말리는 과정.
나무 말리는 과정.

◇소목장의 역사

나무를 다루는 장인을 목수라고도 하는데 목수에는 대목장(大木匠)과 소목장(小木匠)이 있다. 대목장은 궁궐·사찰·주택 등 건축물의 가구(架構)를 짜는 공정을 담당했고, 소목장은 건축의 구조물이 아닌 창호(窓戶), 조정(藻井), 벽장, 실내에 비치되는 목조(木造) 가구나 목조 기물 등을 담당했다. 우리나라에는 나무가 많아 일찍부터 목기를 사용했으나, 소목장이라는 용어는 고려 시대의 기록에서 비로소 볼 수 있다.

고려사(高麗史), 고려도경(高麗圖經)을 통해 소목장이 국가와 왕실 소용 목공예품들을 제작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 목공예 관련 부서로는 도교서(都校署), 중상서(中尙署), 공조서(供造署)가 있다. 도교서에는 나무로 작업하는 담당 장인이 있었고, 공조서에도 소목장, 마장(磨匠)이 있어 왕이 쓰는 다양한 기물들을 제작했다. 조선 시대 관련 부서로는 선공감(繕工監), 공조서(供造署) 등이 있다. 조선 초기까지는 목가구가 주로 왕실, 상류 계층을 중심으로 제작되었으나, 시대가 내려오면서 민간에 널리 보급되고 종류도 많아져 지역적인 특성이 현저히 나타나게 되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소병진.
국가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소병진.

◇국가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소병진

국가무형문화재 55호인 소병진 소목장은 오랜 기간의 연구를 통해 사라져가던 전주장을 재현한 공로와 전통기법의 숙련성과 미감을 인정받아 2014년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선공감이었던 증조부와 대목수였던 조부를 비롯하여 집안에는 많은 대목장과 소목장들이 있었고, 그중 소목 기술이 뛰어난 8촌형인 소병석 덕분에 소병진 소목장도 어린 나이부터 자연스럽게 소목 일을 익힐 수 있었다.

이후 지역의 유명 가구공방에서 본격적인 기술을 익혔고 1970년대 중반에 독립하여 공방을 차렸다. 1990년 서울의 골동품상에서 발견한 예사롭지 않은 형태의 전통장을 연구하던 중, 그 장이 120년 전 전라북도 전주와 완주지역에서만 만들어져 사용된 화려한 장석을 특징으로 하는 ‘전주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주장.
전주장.

 

그때부터 소병진 소목장은 전주장 연구에 매진했고, 20여 년 후 복원에 성공한다. 그의 전통 목가구에 대한 전승과 복원 연구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전주장은 주로 500년 이상 국내에서 자생한 질 좋은 느티용목의 무늬만 골라 사용하고, 외부는 물론 내부까지도 완전 통판의 부재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앞면의 알갱이를 제작하는 방식인데, 전면의 화장판과 뒷면의 오동판 사이에 다른 부재적층 한지를 배접한다는 점으로, 전주장에서만 사용하는 적층 기법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기법을 응용하여 새로운 미감을 찾는 작업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 또한, 소병진 소목장은 그만의 독창적인 면 분할로 새로이 창작된 사방탁자를 만들어냈다. 사방탁자는 과거 남성들이 기거하던 사랑방이나 서재에 책과 문방구류를 올려놓는 사방이 트인 간결한 가구로 청빈한 선비의 기개를 상징한다. 그의 사방탁자도 청렴한 선비 모습처럼 더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만큼의 참죽나무 각재들이 맞장부 맞춤과 십자걸이 맞춤을 바탕으로 가볍지만 단단하게 서로 맞물려 있다.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주거공간에서도 활용할 수 있도록 세로뿐만 아니라 가로로도 배치할 수 있게 디자인되어 있어, 사용자를 위한 장인의 지혜가 돋보인다.

밀라노에 출품한 소병진의 사방탁자.
밀라노에 출품한 소병진의 사방탁자.

 

국가무형문화재 소목장 소병진이 사용하는 나무로는 느티나무, 회화나무, 먹감나무, 소나무 등이 대표적이다. 느티용목은 ‘다온수’라 한다. ‘다온’은 좋은 일이 모두 생긴다는 의미다. 예로부터 느티나무는 신이 깃들어 있다고 여겨져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로 모셔져 왔다. ‘느티’의 어원을 살펴보면 느티나무의 한자 ‘槐(괴)’는 넋과 마음, 혼이 머무는 나무라고 알려져 있다. 티나무가 지닌 신성한 징조를 가리키는 ‘늦’과 위로 솟구치는 나무의 형상을 가리키는 ‘티’가 합쳐져 ‘느틔’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느티를 나타내는 함경도 방언인 ‘느지’에는 경사롭고 길한 징조라는 뜻이 담겨 있다. 오랜 세월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든든한 버팀목으로 마을 지킴이로서 그 시간을 함께해 온 느티나무는 삶의 느긋함과 늠름함을 표상한다. 서두르지 않는 느림의 공간이며, 수많은 생명을 끌어안는 어머니 나무라 일컬을 수 있다.

500년 된 느티나무.
500년 된 느티나무.

 

회화나무는 대한민국과 중국, 그리고 유럽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나무다. 창덕궁 회화나무군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성균관의 명륜당 앞 회화나무, 경주 옥산서원의 화나무 등 전국 곳곳의 성리학 공간에서 회화나무를 만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회화나무는 ‘ 학자수’라고 부른다. 회화나무가 집안에 심어지면 행복이 찾아온다고 믿었고, 임금이 하사하여 귀하게 여겼으며, 중국이나 유럽에서도 최고급 나무로 인정받고 있다.

‘온고 갤러리’ 전경.
‘온고 갤러리’ 전경.

 

실제로 ‘온고 갤러리’에는 1천500년 된 회화나무 탁자가 전시되어 있다. 탁자로 변신한 회화나무는 벽사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그 존재 자체로 엄청난 위용을 뿜어낸다. 소목장에게 전승되어 내려오는 상감 기법이 1천500년 넘은 회화나무 탁자에 적용되어 뛰어난 조형미와 재질감이 잘 나타나 있다. 회화나무 안에서 발견된 돌멩이들은 성황당 문화와 관계가 있다. 나뭇가지 사이에 얹혀 있다가 나무의 빠른 성장으로 나무 속에 자리잡은 것이다.

1천500년 된 회화나무 탁자.
1천500년 된 회화나무 탁자.

 

먹감나무는 감나무가 최소 몇백 년이 지나 자연의 먹이 스며들어 최고의 색상과 무늬를 뽐낸다. 그야말로 자연이 만들어낸 미술품이다. 용목은 자연스럽게 나이테의 문양이 변하여 나무의 가치가 극한으로 올라가게 된다. 온고 갤러리의 입구에는 500년 이상 오래된 느티용목이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뽐내고 있다.

조선 가구의 정수는 좌우 대칭이며 미니멀리즘(minimalism)을 구현한다.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소목장은 국가무형문화재들 간의 협업을 통해 글로벌 가구 시장에 도전하고 있다.

 

김동철 ㈜온고 대표이사,

前 한국전통문화전당 초대원장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