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나누고 먹은 산해진미
함께 나누고 먹은 산해진미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2.11.14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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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박찬일 -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기억(記憶), 지난 일을 잊지 아니함, 추억(追憶),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함. 두 단어는 묘한 차이가 있다. ‘내 잊지 않고 널 기억해 두마’는 약속인 동시에 어떤 상황에 대한 복기(復記)다. 따라서 닥치는 상황마다 해석이 다르다. ‘그런 일이 있었지.’는 반추(反芻)다. 다시 끄집어내 생각하는 일이다. 이렇게 매번 기억과 추억은 충돌한다. 음식 솜씨 자랑하는 이른바 세프들 전성시대다. (아, ‘영자의 전성시대’는 왜 따라오는지).

박찬일 씨,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를 맛있게 읽었다. 기억과 추억을 동시에 따라오게 만든다. 훌륭한 음식은 레시피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니라 둘이 동시에 힘을 합해 만들어 낸다. 시간이 될 수 있고 공간이 될 수 있으며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기타 등등도 포함된다.

박찬일 씨는 세프일까? 글쟁이일까? 상관없다. 글도 맛을 가지고 있다. 라면 하나를 끓여 먹더라도 김훈 선생은 정확하게 계량해 맛을 찾아내건만 계산은 사라지고 맛만 살아난다.

‘물의 양은 550ml가 아니라 700ml여야 하고, 면과 분말 수프를 넣은 뒤 4분 30초가 아닌 3분만 끓인다…. 대파는 10개만 쓰되 밑동만 잘라 세로로 잘게 쪼개 놓았다가 라면이 2분쯤 끓었을 때 넣는다… 풀어놓은 달걀 투하 후 한 번 젓고 뚜껑을 빨리 닫은 후 30초쯤 기다린 후 먹어야 한다’는 설명은 김 작가만이 가진 노하우(knowhow)이지 계량법으로만 여겨서는 곤란하다. **탕면 조리법에는 물양은 550ml, 시간은 4분 30초다. 수프를 먼저 넣으면 끓어오름 현상 화상을 입을 염려도 있단다. (조리법에는 ‘스프’라 되어있네) 이래야 가장 구수한 맛이 완성된단다.

박 작가는 이 맛을 짜장면에서 또 한 번 재해석한다. ‘오래전 산둥 사람이 태반이던 화상들은 대파의 흰 부분을 툭툭 잘라 반찬으로 내주었다. 찍어 먹는 장도 갈색의 전통 산둥 춘장이었다…그 대파에는 산둥 사람의 유전자랄까, 전통 음식을 내는 원형질 같은 게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 어렸을 때는 제법 진짜 짜장면을 먹었던 셈이다.’

원조(元祖)라는 말은 ‘그 일을 처음 시작한 사람’을 뜻하지만 맛에도 ‘원조’가 있다. 난데없이 ‘짜장면’은 틀렸다, ‘자장면’이 맞다고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일을 생각하면 가소롭기 짝이 없다. ‘곱배기’보다 ‘꼽배기’라 해야 더 차진 맛이 따라온다.

 

음식을 앞에 놓고 있자면 항상 그늘처럼 따라오는 그리움이 있다. 특정한 음식은 꼭 별미(別味)라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 책에 등장하는 닭백숙, 국수, 국밥…을 비롯해 타국에서 생소하게 맞닥뜨렸던 파스타, 딤섬 등은 이제 멀리까지 가지 않아도 언제나 곁에서 만날 수 있다. 이별이란 통지서를 대신한 친근함을 동봉한 채.

‘맛’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 평생 쌓은 우정도 하루아침에 무너뜨리는 세상이지만 든든한 배짱을 키워주는 한 그릇에는 눈물을 닦게 하고, 웃음 짓게 하는 힘이 있다. ‘먹고살다’라는 말이 있다. ‘먹고’와 ‘살다’를 띄어, ‘먹고 살다’라 쓰지 않고 붙여 쓰는 ‘한 낱말’인 까닭은 밥이 곧 삶이라는 뜻이다. 생애 끝까지 함께 할 ‘밥’은 이름은 다양해도 생활이고 삶 전체다.

가난이 유산(遺産)인 시절이었던 사람이 많을 테다. 하지만 궁색한 살림살이를 남루(襤褸)라고 말해도 곧바로 처량(凄?)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나를 데워준 한 끼. 그 음식에 담긴 시절을 생각하면 고난 정도야 지금 사는 대로 이어가면 된다.

어릴 적으로 되돌아가 보면 미로(迷路)인지 골목길인지 분간이 안 가는 동네, 새벽을 깨우는 두부 장수 방울 소리는 곧장 ‘배고픔’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아련하게 따라오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장면이 겹쳐져 슬며시 미소 짓게 한다. 책 제목이 끌어당기는 매력,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는 문장은 맛깔스럽다. 짜다, 맵다, 시다, 달다, 슴슴하다는 말은 각자가 가진 잊지 못하는 맛이다.

박찬일 작가가 제일 좋아하는 술안주는 다름 아닌 ‘그냥 김치 한 보시기, 면 넣지 않은 간짜장 소스와 잘 지진 군만두’다. 그대가 최애(最愛)하는 음식은 무엇인가? 산해진미(山海珍味)란 잘 차려진 밥상이 아니라 함께 나눈 사람과 잊지 못할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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