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그리고 깊게 읽기
천천히 그리고 깊게 읽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2.11.01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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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권장 도서 100선’. 매력적인 이 문구는 대학생을 위한 대표적 고전 목록의 하나다. 일반인이나 초중고 학생들도 권장 도서 목록에 한 번쯤 관심을 가져보았을 것이다. 서울대 기초교육원뿐만 아니라 다양한 기관에서는 매년 여러 분야를 망라한 권장 도서 100선을 선정해 교양 도서로 추천하고 있다. 어린이, 청소년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 류의 고전 읽기 운동은 ‘시카고 플랜(The Great Book Program)’이 그 모델이다. 시카고 플랜은 시카고대의 고전 읽기 프로젝트로, 1929년 허친스(Robert M. Hutchins)가 30세 나이에 미국 시카고대 총장으로 부임하면서 시작됐다.

허친스는 지식교육과 항존주의(恒存主義, perennialism)로 대표되는 교육자다. 그가 오기 전까지 시카고대는 명문대로 여겨지지 않았다. 허친스는 학생들에게 인류 문화유산의 정수인 고전을 의무적으로 읽게 하고 이를 졸업 필수코스로 만들었다. 그 무렵 미국은 경제 대공황으로 인해 취업에 도움 되는 실용적 학문이 주류였다. 이런 풍토 때문에 학생들과 교수들의 반발도 있었지만 시카고 플랜은 계속 추진되었고, 시간이 흘러 오늘날 시카고대를 명문으로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고전 읽기는 단순히 옛 서적을 읽고 내용을 암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고전의 내용을 읽고 스스로 질문하고 같은 책을 읽은 다른 학생들과 토론하는 과정을 거친다. 타인이 만든 문제와 답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생소한 방법이겠지만, 사고력은 하늘에서 뚝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만든 문제와 그 속에서 답을 찾는 과정을 통해 지식의 구조화가 일어난다. 고전 읽기를 통해 사고력을 키우게 되는 것이다.

하시모토(橋本武)가 시도한 소위 슬로우 리딩(slow reading)도 잘 알려진 독서법의 하나다. 한국에서는 온책읽기, 느리게 읽기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일본 나다학교의 국어교사로 부임해 학생들과 3년 동안 교과서 대신 단 1권의 책 『은수저』만 읽었다. 천천히 그리고 깊게 단 몇 쪽만 국어 수업에서 다루거나 반쪽만 수업하기도 했다.

『은수저』는 일본의 대표적 근대소설로 알려져 있다. 나카 간스케(中勘助)가 1913년 단행본으로 펴낸 이 책은 근대일본을 배경으로 성장기를 어린이의 시각에서 어린이의 언어로 잔잔하게 다루고 있다.

하시모토는 학생들과 함께 이 소설을 다루며 100여 년 전 또래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가령 글 속에 전통 과자가 나오면 직접 구해서 학생들과 함께 먹어보고 무슨 맛인지, 당시 사람들은 이 전통 과자를 먹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의미를 발견했다. 슬로우 리딩을 통해 질풍노도의 청소년들과 함께 근대일본의 도쿄 어린이가 경험한 세시풍속, 교우관계, 정의, 자연 등 성장기의 잔잔한 체험을 되새겨본 것이다.

일찍이 퇴계는 “무릇 독서 후 그 의미에 익숙해지지 못한다면 읽자마자 잊어버려 마음속 깊이 간직할 수 없다”고 했다. 이는 책을 암기하는 것과는 다르다. 퇴계는 이미 알고 난 뒤라도 자세히 묻고 답하는 과정을 거치며 내 삶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숙독(熟讀)을 권장했다. 글을 음미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독서의 양에만 집착하다 보면 정작 그저 문자를 읽을 뿐 자기 삶 속에 녹여낼 수 없다.

물론 다독(多讀), 속독(速讀)도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한 권의 책을 천천히 그리고 깊이 있게 읽어 보는 숙독(熟讀)도 좋은 독서법이 될 것이다.

가을이다. 문장을 천천히 곱씹어 보며 글의 의미를 되새긴 선조들의 독서법을 떠올려보았으면 한다. 그리고 여유를 갖고 하나의 관습적인 정답만 고집하지 않는 열린 독서를 시도했으면 한다.

윤한성 송정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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