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5주년 기획특집]“울산-전주 전통문화 경쟁력 키워 문화선진국으로”
[창간 15주년 기획특집]“울산-전주 전통문화 경쟁력 키워 문화선진국으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2.10.26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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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수도 울산’과 ‘문화수도 전주’가 맞손 잡으면-⑴ 전주(全州)의 국가무형문화재

울산은 누구나 인정하는 대한민국의 산업수도이자 경제의 심장이다. 동시에 울산은 선사시대 선조들이 새긴 대곡리·천전리 바위그림(巖刻畵)의 뛰어난 조형미 덕분에 ‘한국미술의 시발점’으로도 불리는 고장이다. 조선 시대에 전라감영(全羅監營=전라도·제주도를 관장하던 관청)이 있었던 전주는 예로부터 기능과 예능의 장인이 넘쳐나는 예향(禮鄕)이다. 동시에 전주는 한국의 멋과 맛이 가장 잘 보존된 도시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고장이다.

‘산업수도 울산’과 ‘문화수도 전주’가 함께 만나 대한민국 콘텐츠 발전을 위해 두 손을 맞잡고 협업한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울산제일일보는 이 물음에 대한 해답도 끌어낼 겸 창간 15돌을 맞아 관련 특집기획 글을 10차례에 나누어 싣기로 한다. -편집자 붙임-

복원된 전라감영 모습.
복원된 전라감영 모습.

울산은 자타가 인정하는 대한민국 산업수도다. 한국경제의 심장이다. 울산의 박동이 멈추면 대한민국은 소멸할 수 있다. ‘전주(全州)’는 한국의 멋과 맛이 가장 잘 보존된 도시다. 대부분의 독자는 ‘전주’ 하면 먼저 한옥과 비빔밥이 떠오를 듯하다. 하지만 전주의 매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전주는 조선시대에 전라남북도와 제주도를 관할하던 전라감영이 있던 도시다. 예로부터 기능과 예능의 장인들이 넘쳐나는 예향(禮鄕)의 고장이다. 무엇보다 우리 고유의 것을 지켜나가며 현재와 미래의 접점을 찾아가는 활기찬 도시다.

필자는 전통의 가치가 잘 보존되어있는 전주에 머무르는 동안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조상들의 삶의 지혜와 얼이 서린 문화유산의 가치를 재발견하여 고부가가치 전통 문화산업으로 발전시킬 수는 없을까? 우리 민족의 고유자산인 전통문화 자원의 가치를 인정하고 경쟁력을 키워 문화선진국으로 진입하는 마중물이 되면 어떨까?” 하는 물음표를 스스로 던지기 시작했다.

문화재의 길에 들어선 이수자들의 처우는 척박하기 이를 데 없고, 전수 조교가 되기 위해서는 오랜 인고의 세월이 필요하다. 인고의 세월 동안 아무런 지원 없이 스스로 생계를 책임져야 하다니 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이러한 안타까움과 소명의식을 가지고 제2의 인생을 전통문화의 산업화를 위해 뛰어들게 되었다. ㈜온고는 전통문화 자원과 현대 과학기술의 융합을 통한 산업의 활성화를 위해 설립된 연구소기업이다. 국가무형문화재가 만들어낸 성과물에 인문학을 입혀 홍보 마케팅을 전개한다. 전통과 현대, 그리고 과학이 융합한 전통문화를 디자인하여 브랜드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2019년 10월에는 두바이에서 개최된 한류 박람회에 참가하여 K-Heritage에 대한 작품들로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때 출품한 많은 작품 중 특히 별자리가 새겨진 주방용 칼에 대해 많은 질문을 받았다. 중동지역에서는 별자리와 칼에 대한 관심이 남다름을 재확인하는 시간이었다. K-POP, K-Beauty와 함께 K-Heritage의 세계화 가능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온고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줄임말로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배운다는 뜻이 담겨 있다. 또한, 온고 로고는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의 정신과 문화 중흥의 생각을 고어로 표현했다. 전통문화 가치의 복원과 산업화를 목표로 무형문화재 간의 네트워크를 통한 협업과 산업화의 초석이 될 플랫폼을 구축하고 있다. 이후 ㈜온고는 부단한 노력을 통해 2020년에 문화관광부가 지정하는 예비 사회적기업에 선정됐고, 이어 2021년에는 헤리티지(=문화유산) 산업화 연구소기업으로 선정됐다.

50년 가까운 시공간을 초월한 중동고 친구인 한국화학연구원 이동구 박사가 있는 울산과의 인연도 특별하고 각별하다. 평소에 옻칠의 우수성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차에 우연히 통도사 장경각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날 서운암 장경각 연못에 수중전시된 옻칠의 엄청난 스케일에 한 번, 그 아름다움에 두 번, 그리고 그 창의력에 세 번 감탄했다. 그 후 필자는 장경각 옻칠에 크게 감명받아 새로운 전통문화 산업의 갈 길에 대해 고민하고, 전주와 울산의 여러 지음(知音)들과 함께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탐색하려고 한다.

현재 전주에는 무형문화재가 31종목에서 42명의 보유자와 보유단체가 지정되어있다. 예는 12종목에 18명의 보유자가 있고, 공예는 19종목에 24명의 보유자가 있다. 우선, 전주 무형문화재의 특징은 기능 종목이 예능 종목보다 많다는 점이다. 예능 종목 중 판소리와 선자장이 무형문화재의 1/4을 차지할 정도로 판소리 명창이 많으며, 이에 걸맞게 소리의 전승이 잘 이뤄지고 있다. 한국전통문화전당 초대원장을 지낸 필자는 전주와의 인연이 깊어지면서 전주의 매력과 무한한 가치에 빠져들게 되었다. 타향인 이곳에 터를 잡고 제2의 인생과 즐거움을 찾게 되었다.

더 나아가 2018년에는 전통문화를 산업화하는 데 앞장설 연구소기업 ‘㈜온고’를 설립하여 뜻을 함께하는 13인의 국가무형유산과 긴밀한 협력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전주와 ㈜온고는 울산과 울산시민들에게 낙죽장도장, 옻칠장. 소목장, 한지장, 채상장, 염색장, 일월오봉도 오르겔 등 수백 년의 헤리티지를 이어가는 국가무형문화재와 장인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온고와 협업하는 국가무형문화재들.
㈜온고와 협업하는 국가무형문화재들.

◇국가무형문화재 제60호 낙죽장도장 한상봉

한상봉은 낙죽과 장도의 기술을 함께 보유한 장인이다. 낙죽장도의 특징은 손잡이와 칼집을 만들 때 일곱 마디 이상의 단단한 대나무를 사용하고 거기에 고전에 등장하는 시나 성현들의 가르침을 새겨넣는다. 불에 달군 인두로 대나무에 글씨를 새기는 것을 낙죽(烙竹)이라고 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장도는 장인이 만들지만, 낙죽장도는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선비가 직접 만드는 공예품이다. 대나무의 절개를 담은 낙죽장도는 부드러우면서 약하지 않고 강하면서도 유연한 칼이며, 문무의 조화를 이루는 선비의 칼이다. 성리학의 근간인 조선 선비들 간에 비전으로 전해져 오는 낙죽장도의 공예 기술을 대대로 계승 발전시킨 가문이 있었으니 바로 한상봉 가문이다. 이후 부친인 한병문과 함께 합심하여 ‘왕의 칼’ 사인검을 복원했다.

한상봉은 당시를 회고하며 사인검 복원이야말로 한씨 가문의 승리이자 가문의 영광이었다고 말한다. 그 후로도 꾸준히 가업에 매진하여 부친에 이어 2012년 국가무형문화재 낙죽장도장으로 지정되었다. 이에 머무르지 않고 전통문화의 산업화를 위하여 연구개발에 힘쓰고 있다. ㈜온고는 한상봉과 협업하여 전통문화 기반의 칼 기술 개발에 성공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통도사 서운암 장경각 수중 전시 모습.
통도사 서운암 장경각 수중 전시 모습.

 

◇국가무형문화재 제113호 옻칠장 정수화

칠장은 옻나무에서 채취하는 수액을 용도에 맞게 정제하여 기물에 칠하는 장인이다. 나무에서 채취한 칠은 정제 과정을 거쳐야만 옻액의 불순물 등이 제거되어 입자가 고운 칠로 변하게 된다. 칠하는 과정은 먼저 소지를 다듬은 후 생칠을 바르고 갈고 바르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한다. 그 후 다시 초칠, 중칠을 하며 건조시키고 다시 상칠을 한 후 광내기와 생칠을 반복적으로 하여 마감한다.

정수화 선생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중학 진학을 미루고 먼 친척인 주현호 선생의 공방에 나전칠기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입문했다. 이때 칠 일을 하면서 나전까지 전수하게 된다. 정수화 선생은 40여 년간 전통 옻칠과 나전칠기 작업의 외길을 걸어온 장인이다. 일제 강점기 옻의 수탈로 맥이 끊어진 옻칠 정제법을 재현하여 윤택하고 신비로운 색채가 돋보이는 우리 옻칠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문양 그리기부터 마감 칠까지 완벽한 구상력과 양질의 정제칠 및 공예재료를 고수하는 장인정신으로 2001년 국가무형문화재 칠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지난 2005년에는 종묘 정전의 제상에 황색칠 도장 작업을 맡는 등 우리나라 최고의 칠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두바이 한류 박람회에 참가한 ㈜온고.
두바이 한류 박람회에 참가한 ㈜온고.

◇국가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소병진

궁중의 거실 공간에 들어가는 가구를 생산하고 왕의 하사품을 만들던 목수들을 소목장이라 한다. 조선시대 선공감이었던 증조부와 대목수였던 조부를 비롯해 집안에는 많은 대목장과 소목장들이 있었고, 그중 소목 기술이 뛰어난 8촌 형인 소병석 덕분에 소병진 소목장도 어린 나이부터 자연스럽게 소목 일을 익힐 수 있었다. 조선 한식 가구의 제작기법을 재현해 만든 전주장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전통 방식의 버선장, 이층장, 머릿장을 복원했고 나무의 변형을 막기 위해 나무판 사이에 한지를 배접하는 적층 기법으로 특허를 받았다. 이런 실력을 인정받아 2014년 국가무형문화재 55호로 지정되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17호 한지장 홍춘수

한지는 닥나무와 황촉규를 주재료로 하여 고도의 숙련된 기술과 장인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완성된다. 닥나무를 베고, 찌고, 삶고, 두들기고, 고르게 섞고, 뜨고, 말리는 마지막 사람이 백 번째로 만진다 하여 옛사람들은 한지를 ‘백지(百紙)’라 부르기도 했다. 특히 전주 일대는 깨끗한 물과 풍부한 재료 등의 자연환경과 전라감영이라는 행정의 중심지로서 한지 제조가 가장 활발했다.

홍춘수 한지장은 대대손손 전주 한지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장인이다. 홍춘수의 부친은 전통기법으로 한지를 생산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당연하게 한지 만드는 법을 접했다. 19살 되던 때에 선친과 함께 본격적으로 지장의 길로 들어선다. 그 후로 부단한 노력을 통해 2006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35호 지장으로 인정되었고, 2010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17호 한지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53호 채상장 서신정

채상장은 얇게 저민 대나무 껍질을 여러 가지 색으로 물들여 다양한 문양이 나오도록 엮는 장인이다. 채상(彩箱)은 궁중과 귀족층의 여성들이 즐겨 사용하던 고급 공예품의 하나로 조선 후기에는 양반 사대부뿐만 아니라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혼수품으로 썼으며, 주로 옷, 장신구, 침선구, 귀중품을 담는 용기로 사용되었다. 얇게 떠낸 대나무를 물에 불려 염색한 후 몇 가닥씩 엇갈아 가며 엮고 모서리와 테두리를 비단으로 감싸 완성한다. 단단한 대나무에서 얇고 부드러운 속살을 뽑는 것도 신통하지만 속살이 종이처럼 자유롭게 휘고 접히며 견고한 상자의 형태를 갖추는 것도 오묘한 일이었다.

정약용은 채상을 일컬어 ‘비단과 같은 상자’라고 언급했다. 학창 시절부터 손재주가 좋았던 서신정은 채상장인 부친의 가업을 이어받게 되었다. “대나무 살을 만지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그저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거든요.” 지금도 열정 넘치는 태도와 웃음으로 채상 일에 몰두하고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15호 염색장 정관채

1984년 정관채와 그의 스승 박복규 교수는 쪽빛 무명베를 들고 서울의 예용해 선생을 만나러 갔다. “와! 쪽빛이 이런 색이구나.” 1978년 예용해 선생이 박복규 교수에게 쪽씨 하나를 건네준 후 맥이 끊긴 쪽 염색을 다시 살려낸 정관채의 솜씨를 보고 감탄한 말이다.

염색장은 천연염료로 옷감을 물들이는 장인을 말한다. 옷감을 물들이는 데 사용하는 염료로는 식물, 광물, 동물 등에서 채취한 천연염료나 약간의 가공을 통해 만든 염료를 사용한다. 염색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중 쪽 염색은 ‘쪽’이라는 식물에서 추출한 염료를 가지고 옷감 등을 물들이는 것으로, 염색과정이 가장 어렵고 까다로우며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정관채 염색장은 주변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젊은 나이부터 꾸준하게 전통을 계승해 온 결과 2001년 당시 최연소 나이로 중요무형문화재 염색장으로 인정받았다.

◇국가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이형근

유기장은 놋쇠로 각종 기물을 만드는 장인이다. 유기의 종류는 제작기법에 따라 방자와 주물, 반방자가 있다. 가장 질이 좋은 것으로 알려진 방자는 녹인 쇳물로 바둑알같이 둥근 놋쇠 덩어리를 만든 다음 이것을 여러 명이 망치로 탕탕 쳐서 일정한 형태로 만드는 기법이다. 방자로는 악기나 식기를 만든다. 주물유기는 ‘퉁쇠’라고도 부르는데, 쇳물을 틀에 부어 만드는 기법으로 안성 지방의 장인들 솜씨가 가장 유명해 ‘안성맞춤’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다. 반방자유기는 주물기법과 방자를 혼용하는 기술이다.

우리나라 유기의 역사는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시기는 인류 역사에 있어 최초로 합금술이 발명된 때다. 신라시대에는 유기를 만드는 국가 전문기관인 ‘철유전(鐵鍮典)’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더욱 발달하여 얇고 광택이 아름다운 유기가 만들어졌고 품질도 우수해 신라동(新羅銅), 고려동(高麗銅)이라 불리며 수출되었다. 평안북도 납청유기의 전통 승계자인 부친 이봉주 옹을 거쳐 그 아들인 이형근이 2대째 그 비법을 전해오고 있다. 우리 민족의 지혜와 이 땅의 오랜 전통이 숨쉬는 우리 문화의 소중한 무형자산이다.

◇일월오봉도 파이프오르간 마이스터 홍성훈

2021년 7월 한국관광공사에서 대한민국 대표 고급문화 10선에 ‘한국 오르겔(파이프오르간) 제작’이 선정되었다. 오르겔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디자인, 설계, 음향, 주물, 수학, 공학, 철 등 자생적 산업의 토대와 인프라가 필요하다. 동이족, 고구려 시대 때부터 사용되어오던 ‘생황’이라는 악기가 있다. 여러 개의 길이가 다른 대나무를 엮어 화음을 내는 악기인데 그 구조가 파이프오르간 구조와 비슷하다. 파이프오르간에 우리의 소리를 담아내려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리의 르네상스가 한국에서 시작되기를 바라면서 우리만의 독특한 일월오봉도 대나무 파이프오르간을 제작하려 한다.

한국에서의 오르겔 제작의 역사는 20여년 전 홍성훈 마이스터가 독일에서 귀국하여 시작된 것이라 그리 길지 않다. 하지만 그 훨씬 이전에 이미 오르겔 제작에 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하던 이들이 있었다. 하나는 250여년 전인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담헌(湛軒) 홍대용이 첫 번째고, 또 한 사람은 영조 때의 연암(燕巖) 박지원이 두 번째다. 그들은 중국 북경에서 오르겔을 보고 감격한 나머지 각기 견문록을 남겼는데, 그중 하나가 담헌의 ‘을병연행록’이고 또 하나가 연암의 ‘열하일기’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나라의 오르겔에 대한 역사적 기간도 꽤 오래된 셈이다.

 

 

 

김동철 ㈜온고 대표이사,

前 한국전통문화전당 초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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