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티 보이즈 - 도시, 플라스틱 러브
비스티 보이즈 - 도시, 플라스틱 러브
  • 이상길 기자
  • 승인 2022.10.20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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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비스티 보이즈' 한 장면.

도시의 밤은 차라리 낮보다 뜨겁다. 네온사인의 서늘한 열기 속에 낮 동안 딱딱하게 굳어있던 도시인들의 진심은 밤이 되어서야 서서히 녹아내린다. 진심은 늘 술로 달궈지고, 해서 도시의 혈관은 밤만 되면 온통 알코올로 물든다. 그들이 술을 마시는 까닭은 마시다 보니 늘게 된 까닭도 있지만 상처받아 너덜너덜해진 자신이 싫은 것. 그나마 술에 취하면 왠지 새로워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 새로움이란 공허함을 깨닫는 과정이기도 하다. 술에 잔뜩 취하면 몸뚱어리는 어느새 비틀거리다 못해 흐물흐물 유체가 되고, 비로소 마주하게 된 공허함 앞에 문득 채워지고 싶어 스며들 곳을 찾는다. 

허나 콘크리트로 쌓아올린 도시는 빗물조차 스며들 곳이 잘 없다. 돈, 돈, 돈. 그나마 돈이 있으면 스며드는 척 할 순 있지만 돈이란 건 늘 부족한 게 문제. 더 큰 문제는 술에 취하면 용감해진다는 것. 마음 둘 곳 없어 당황스런 영혼들은 그렇게 스며들 곳을 찾아 내일을 쉬이 잊어버린다. 하긴, 어차피 하루하루 죽어가는 인생, 즐겁지 않은 것들은 모조리 악하니까. 

한편 <비스티 보이즈>에서 승우(윤계상)와 재현(하정우)은 그런 슬픈 영혼들을 달래주는 일을 한다. 전문용어로 호빠(호스트빠) 선수들이었던 것. 도심 한 복판에 자리 잡은 그곳엔 스며들고 싶어 안달 난 외로운 영혼들이 밤이 되자 하나둘씩 모여들었고, 어디선가 술에 잔뜩 취해 찾아온 여자1이 옆에 앉아 연신 담배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승우에게 말한다. "나 진짜 외로워. 나랑 사귀자." 

진심을 다해 만났다 헤어짐을 몇 차례 반복하다보면 이젠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사랑하게 된다. 그때부터는 90점 이상이 아닌 20점이라도 괜찮다. 적당히만 생기면 사랑할 수 있다. 즐겁기 위해. 진심을 다했던 과거의 그 사랑들도 결국 끝이 났는데 하물며 지금 이 감정이야, 어차피 다 게임일 뿐이니까.

그랬거나 말거나 승우에게 여자1은 그냥 손님, 아니 돈이었다. 그건 여자2도 마찬가지. 하지만 여자2의 생일을 맞아 함께 온 친구 지원(윤진서)은 조금 달랐다. 느낌적으로 끌렸던 것. 그런 승우에게 그 바닥 선배인 재현이 말한다. "이 일 하면서 그런 감정 한 두 번일 거 같아? 야. 시작하지마. 그럼 너 이 일 못한다."

허나 스펀지에 잉크가 스며들듯 심장을 파고드는 사랑의 감정이란 불가항력적인 것. 게다가 제대 후 취업도 안 되고 이리저리 굴러먹다 바닥까지 내려온 자신의 삶에 그런 감정은 감히 행복이라 단언할 수 있었다. 마침내 승우는 그 행복을 믿기로 했다. 어쩌면 승우에게 있어 지원은 '그 사람'을 사랑한 첫사랑이었을지도. 

하지만 그녀가 사는 오피스텔 욕실엔 칫솔이 너무 많았다. '2차는 안 나가는 텐프로에서 일한다고 했는데. 설마 아닐 거야'라면서도 자꾸만 불안한 승우. 그럴수록 승우는 지원에게 스며들기 위해 없는 돈까지 해주며 더욱 애를 쓰지만 그녀와 몸을 섞을수록 푸석푸석한 느낌만 들었다. 그건 마치 플라스틱과 플라스틱이 맞닿는 것 같았다. 허나 그럴 수밖에. 마음을 다 주기엔 자신이 너무 초라했고, 그렇다고 상대방을 완전히 믿을 수도 없었다. 하긴, 온통 딱딱한 콘크리트로 뒤덮인 도시에서 애초에 무얼 기대할까. 스며들 수 없어 슬픈 콘크리트 위에서 놀아나는 '플라스틱 러브'일 뿐이었다. 의심이 쌓여가면서 마침내 승우는 악몽을 꾸다 잠에서 깬 뒤 같이 깬 지원을 향해 이렇게 울부짖는다. "너 혼자 사는데 칫솔이 왜 이렇게 많아?" 깨질 때가 된 것. 허나 플라스틱 러브였기에 그 사랑은 깨질 때도 서글펐다. 그것은 마치 지원이 사는 오피스텔 베란다에서 떨어진 플라스틱 장난감 같았다. 해서 바위가 떨어져 깨지듯 "쿵"하는 소리는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플라스틱 장난감이 차가운 콘트리트에 떨어져 멀리 튕겨나가듯 "퍽"하는 소리가 났고, 도로 한 가운데로 튕겨 나간 그 장난감은 트럭에 밟혀 산산 이 부서져 버렸다. 그랬거나 말거나 그날 밤, 둥글었던 달은 언제 그랬냐는 듯 뾰족한 짐승달로 변해 그 모든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도시를 휘감고 있던 서늘한 네온사인들은 나몰라라는 듯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2008년 4월 30일 개봉. 러닝타임 123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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