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비게이션 엄마 vs 나침반 엄마
내비게이션 엄마 vs 나침반 엄마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2.10.10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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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식이 이럴 리 없다. 가슴 속 불길이 입으로 뿜어져 나올 것만 같다. 아무리 유능한 교사라도 자기 자식을 가르칠 땐 손이 몇 번이나 올라간다고 한다. 수학 문제 수만큼 아이 등을 찰싹 때렸다.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수학 1단원 총복습이 숙제였다. 기초적인 내용이니 어려움 없이 잘 따라가리라 여겼다. 부모가 고등교육을 무난히 마쳤으니 기본적인 학습 능력은 자연스럽게 대물림될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웬걸. 아무리 보아도 쉬운 문제인데 아이는 헤매고 있었다. ‘첫 단원부터 막히면 다음 단원은 어떻게 따라가지’하는 생각에 마음이 다급해졌다. 조곤조곤 다시 설명했지만 아이는 나가서 놀고 싶은 생각에 연신 엉덩이를 들썩였다.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기만 하면 부리나케 쳐다보았다. “나 이 문제 어떻게 푸는지 몰라.” 강아지 같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호통과 잔소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딴에는 유능한 교사라고 자부하는데 내 아이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내 언성이 높아질수록 아이의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 갔다. 연필을 쥔 내 손이 교과서 위를 내달렸고 목소리는 쇳소리를 냈다. 나는 한 대 더 때렸고, 아이는 한 대 더 맞았다.

그 후 며칠 뒤 엄마표 영어모임이 있었다. 영어 교사인 나는 당시 아이를 보충학원에 보내지 않았다. 나는 이 모임에서 가장 느슨한 엄마였다. 아이에게 영어 만화를 꾸준히 들려주고 아주 쉬운 영어를 짧은 시간 안에 가르친다고 이야기했다. 몇몇 엄마가 ‘영어 선생님이 자기 애를 저렇게 가르치면, 우린 걱정 안 해도 되겠네.’ 하며 농담을 건네곤 했다. 그런데 내 처지가 달라져 있었다. 아이를 다그치는 못된 엄마가 된 것이다. 공부 습관을 자연스럽게 키워주겠다는 초심은 사라지고 영어 학습도 꼼꼼히 점검하고 내 마음에 들 때까지 닦달하는 엄마가 되어 있었다.

나는 내비게이션 같은 엄마였다. 내비게이션은 목적지를 향하는 최적의 길을 제시한다. 운전자의 생각과 상관없이 모든 것을 설정하고 목적지로 가는 동안 지시에서 1m라도 돌아가면 삑삑 소리를 낸다.

나는 풀 오토매틱 내비게이션(full automatic navigation)이었다. 주어진 해결방식에서 아이가 조금만 벗어나면 경고음을 냈다. 좁은 산길이나 꼬불꼬불한 사잇길을 가는 것도 좋은 여행일 텐데 ‘경로 이탈’이라고 외쳐 아이를 불안하게 했다. 내가 최선이라고 믿는 길을 제시하고 그 길만을 아이가 따라오게 했다.

목적지에 도착해도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성능이 좋은 내비게이션 엄마였다. 아이의 성적 데이터가 머릿속에 자동 업데이트된다. 오늘 90점을 받았다면 내일은 1점이라도 올려야 직성이 풀린다. 그렇지 않으면 그 길을 다시 달리게 한다. 게다가 내비게이션 엄마는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칭찬하는 법이 없다. 결정적인 흠이고 약점이다.

내가 꿈꾸던 것은 사실 나침반 같은 엄마였다. 나침반은 방향을 알려준다. 길을 잃었을 때면, ‘네가 가던 길은 이 길이었어.’라고 무언의 손가락으로 가리켜줄 따름이다. 나도 방향만 제시하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낯선 길일지라도 우선 가보라고 말하고도 싶었다. 아이가 어른이 되면 주머니에 넣어둔 나침반처럼 엄마라는 이름을 가슴에 넣어두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의지가 되리라 생각했다. 이런 초심은 어디로 가고 아이를 다그치기만 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던 걸까.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면 서서히 나침반 엄마로 변신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손을 잡고 이끌기보다는 한 걸음 떨어져 아이의 성장통을 지켜보는 나침반 엄마, 아이가 길을 잃지 않도록 조용히 격려하는 역할만으로 충분하리라고 생각했다.

그 아이가 이제 고2가 되었다. 나는 여전히 내비게이션 엄마에 머물고 있다. 경고음은 줄이고 자발적으로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아이가 세상에 갖가지 위험이 있다는 걸 알 때까지는 부모의 깐깐한 고집이 아이를 위한 단단한 바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젠 아이가 스스로 헤쳐나갈 때가 왔음을 알아차리고 있다. 서서히 나침반 엄마로 변신해가야 한다.

그래도 학교에서는 여전히 내비게이션이기로 했다. 우리 집 아이가 그랬듯이 사춘기에 다다른 나의 학생들에게도 어른들의 고집스러운 원칙이 건강한 시민으로 자라는 바탕이 되어주리라 믿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성장에는 끝이 없다.

이인경 야음중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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