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적 전략
언어적 전략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2.09.26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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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에 ‘화용론’(話用論, Pragmatics)이라는 분야가 있다. 의사소통을 할 때 구체적으로 어떤 언어표현을 사용해서 목적한 바를 전하고 있는지를 다루는 분야이다. 그중에서도 거절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거절을 언어화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결과가 상당히 흥미롭다.

만약 거절의 뜻을 상대방에게 전할 때 ‘오늘 약속이 있어서 안 될 것 같습니다.’와 같이 말을 끝까지 하는 경우와 ‘오늘 약속이 있어서…’, ‘오늘 약속이 있는데…’와 같이 중도에 말을 끝내는 경우가 있다. 어느 쪽을 주로 사용하느냐는 지극히 개인적인 성향일 수 있다. 하지만 종결어미로 말을 완성하지 않고 연결어미로 어정쩡하게 말하는 방식을 요즘 주변에서 자주 듣게 된다.

일본은 중도에서 말을 끝내는 언어적 전략이 꽤 오래전부터 굳어져 있다.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분명하게 말하기보다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일부만 언급하여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리는 편이다. 상대방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말하는 이의 의도를 파악하고 거절의 뜻을 수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는 손윗사람에게도 동년배에게도 대부분 중도에서 말을 끝내는 언어적 전략을 정중한 표현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전략은 정중함을 내세워야 할 타인에게 주로 사용된다. 격의 없는 사이에서는 이러한 우회적 전략은 불필요하다.

한국에서는 거절할 때, 손윗사람이든 동년배든 종결어미를 사용하여 말을 끝까지 하는 방식이 중도에 그치는 방식보다 정중한 표현이라고 본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말을 끝까지 온전하게 하는 것이 올바른 언어 사용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조금 다르다. 동년배인 경우 친한 사이에서는 ‘오늘 약속이 있어서 안 되겠어.’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지만 친하지 않은 동년배에게는 이렇게 말을 완결짓는 것보다 중도까지만 언급하는 방식도 꽤 사용된다. 이러한 표현이 더 정중한 표현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러한 언어적 전략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두 가지 있다. 화용론 입장에서 그라이스(H.P. Grice)와 레이코프(R. Lakoff)의 주장은 매우 의미하는 바가 깊다. 그라이스는 대화를 대화 참가자의 협력의 산물이라고 생각하고 정상적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일정한 원칙이 있다고 했다. 이른바 ‘협력의 원칙’이다. 여기에는 양, 질, 관련성, 방법의 4가지 대화 법칙이 있다.

‘양’은 대화에 있어서 필요한 양의 정보를 제공해야 하고, ‘질’은 대화에 제공되는 것이 근거가 있는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며, ‘관련성’은 동문서답식의 대화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방법’은 모호하거나 복잡하지 않고 명확하고 간결하고 질서 있게 정보가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명쾌한 의사소통 전략이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레이코프는 이 점에 착안해서 ‘공손의 원칙’을 제안했다. 이 원칙은 세 가지 규칙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강요하지 말 것(Don’t impose), 둘째 ‘상대에게 선택권을 줄 것(Give options)’ 셋째 ‘우호적일 것(Make A feel good - be friendly)’이다.

말을 완결하지 않고 중도에서 끝내는 것은 그라이스의 ‘양의 원칙’과 ‘방법의 원칙’에 위반된다. 관련이 있을 것, 즉 ‘거절’의 의미를 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관련성의 원칙’에도 위반된다. 그리고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질적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 레이코프는 자신의 의도를 상대방에게 강요하지 않고 그 의미를 상대방이 추론할 수 있도록 하여 우호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렇듯 우리의 언어적 전략은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명쾌한 언어표현을 우선시할 것인가 아니면 언어에 의한 전달을 명확하게 하고자 하는 의도보다 상대와의 우호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의도에 중점을 둘 것인가이다. 한국에서도 말을 끝까지 완결하는 형태에서 점차 중도에서 말을 종료하는 현상을 자주 접하게 되는 것은 개인적인 성향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때로 명쾌한 의사소통도 중요하지만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지키고자 하는 의도가 우선시되기 때문일 것이다.

박양순 울산과학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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