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헌트’-제이슨 본, 전두환을 사냥하다
영화 ‘헌트’-제이슨 본, 전두환을 사냥하다
  • 이상길
  • 승인 2022.09.01 19: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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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와 정우성 주연의 첩보물인데다 제목이 <헌트>라니. 게다가 주연을 맡은 이정재의 감독 데뷔작이라니. 때문에 개봉 전 내가 예상한 <헌트>는 스타일리쉬한 첩보영화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인 <본>시리즈였다. 그러니까 한국판 <본>시리즈라 불렸던 류승완 감독의 2013년작 <베를린>을 예상했던 것. 그만큼 맷 데이먼이 주인공 ‘제이슨 본’으로 열연을 펼쳤던 <본>시리즈는 첩보영화의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이미 <007>시리즈를 넘어섰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다 떠나 다른 배우도 아닌 이정재와 정우성이 양복을 입고 총을 들었는데 무슨 말이 필요할까.

해서 <헌트>를 봤던 날, 난 퇴근 후 아주 오랜 만에 <본>시리즈의 OST로 유명한 Moby의 ‘Extreme Ways’를 들으며 극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스크린이 열리자마자 내 예상은 철저히 빗나가기 시작했다. 시대배경이 1980년대 초반이라는 점부터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더니 스토리는 점점 이 나라의 역사 한 복판으로 파고들기 시작하더라. 순간, 깨닫게 됐다. ‘아뿔사. 영화 보기 전에 대강의 줄거리조차 안 읽었었구나’

사실 보기로 작정한 개봉작의 경우 스포일러를 조금이라도 덜 당하기 위해 사전 지식을 깊이 있게 안 들여다보는 편이지만 그래도 대강의 줄거리 정도는 알고 상영관에 들어서곤 했었다. 하지만 <헌트>는 이정재와 정우성이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멋짐 가득한 영화포스터에 반해 선입견이 생기면서 그러지 않았던 것. 또 예고편 영상도 조직 내 스파이를 색출하는 스타일쉬한 첩보물로만 보였지 그 이상은 없을 거라 감히 생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되고 채 10분도 안 돼 그건 진짜를 몰래 숨겨두기 위한 감독의 의도란 걸 알게 됐고, 역사의식의 농도가 점점 짙어져만 갔던 스크린은 그만큼 점점 심각해져 갔다. 왜냐? 그 진짜란 바로 끝내 사과 한마디 없이 가버린 ‘전두환’이라는 인물이었기 때문. 그런데도 영화 속에선 이정재와 정우성의 멋짐이 <본>시리즈의 제이슨 본처럼 폭발하고 있었고, 해서 이 영화는 보는 내내 마치 제이슨 본이 한국에 와서 전두환의 죄를 물어 제목처럼 그를 사냥하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영화라는 게 그렇다. 보고 즐기는 종합예술이지만 그것은 가끔 진실을 말하거나 망자의 한을 풀어주는 씻김굿을 자처할 때도 있다. 그리고 <헌트>는 80년 5월 광주시민들을 학살해가며 절대권력을 차지했던 전두환에 대한 일종의 일갈이고 그 중심에는 이 대사가 있다. “발포 명령이 떨어졌다”

대학 1학년 때 우리 과 과대표는 전라도 광주 출신이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첫 중간고사가 끝난 5월의 어느 날이었는데 과 동기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80년 5월 광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경상도 출신인 나는 TV나 신문에서 보고 들은 대로 그때의 일을 ‘광주사태’라는 익숙한 단어로 지칭했다. 그런데 그걸 들은 광주 출신의 과 대표 동기가 갑자기 발끈한 뒤 “말을 함부러 한다”면서 화를 내더라. 입학식이 있고 채 2개월밖에 지나지 않아 아직 서먹함이 사라지지 않은 때 들은 동기의 갑작스런 반응에 난 어이가 없었고, 해서 며칠 뒤 평소 친하게 지내는 한 선배에게 그 이야기를 털어놓게 됐다. 그러자 역시나 전라도가 고향인 그 선배로부터 난 이런 조언을 듣게 됐다. “전라도 광주에는 지금도 구멍이 두 개가 나 있어. 하나는 옛 전남도청 청사에, 또 하나는 광주 시민들 마음에.” 바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발포명령 때문이었던 거다. 전두환 본인은 끝까지 부인하고 떠났지만. 아무튼 그 일 이후 난 한번도 80년 5월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광주사태’라고 지칭한 적이 없다. ‘광주(민주화)항쟁’이라 불렀다.

그나저나 전두환은 죽어서도 참 괴롭겠다. 무슨 부관참시(剖棺斬屍:죽어서도 죄를 벌하는 것)도 아니고 죽어서까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니까. 사냥을 당하다니. 이 얼마나 굴욕적인가. 그러게 이 양반아, 진심어린 사과 한마디만 하고 떠나지. 사과하는데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아니다. 29만원이나 있다면서! 으이구.

2022년 8월 10일 개봉. 러닝타임 125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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