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산:용의 출현’-이.순.신
영화 ‘한산:용의 출현’-이.순.신
  • 이상길
  • 승인 2022.08.04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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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즐겨 봤던 만화 가운데 허영만 화백의 <날아라 슈퍼보드>라는 작품이 있었다.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져 90년대 초반 TV에서 시리즈로 방영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었다. 중국 고전인 <서유기>를 현대적이면서 코믹하게 그려낸 점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는데 무려 30여년이나 지난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장면이 하나 있다. 그러니까 당시 만화책을 보다 그 장면에서 빵 터지고 말았는데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었던 것.

1부에서 삼장법사, 저팔계, 사오정과 함께 임무(요괴 퇴치)를 무사히 마친 손오공은 2부가 시작되면서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어린애 수준으로 지능이 퇴화되고 만다. 심지어 저팔계와 사오정에 대한 기억도 모조리 잃어버린 상태. 또 변신술 등 어마어마한 자신의 능력도 잊어버렸는데 다행히 저팔계, 사오정, 어부바맨 등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조금씩 기억해내게 된다. 그리고 다시 변신술을 사용할 줄 알게 된 순간 요괴를 만나게 되고, 손오공은 어부바맨에게 뭐가 세상에서 제일 세냐고 묻는다. 그러자 어부바맨은 이렇게 대답한다. “이순신 장군”

아니 슈퍼맨도 아니고, 로봇태권브이도 아니고, 마징가 제트도 아닌 이순신 장군이라니! 가뜩이나 웃겨 죽는 그 만화에서 가장 센 존재로 만화의 분위기와는 아예 결이 다른 우리나라 역사 속 인물인 이순신 장군이 툭 튀어나오면서 빵 터져 버렸던 것. 한편으로는 허영만 화백의 국뽕(‘국가+히로뽕’의 합성어로 자기 나라가 최고라는 것) 센스에 감탄을 금치 못했었다. 그랬다. 그 때까진 그랬다. 국뽕이었다고.

사실 내가 어렸을 때 이순신 장군은 그냥 이소룡과 동급이었다. 동급인 이유는 단순했다. 이름 석 자가 특별했던 것.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에도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었고, 100원짜리 동전에는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하지만 그게 다였다. 환경적으로 이순신 장군이 성웅(聖雄)으로 칭송받는 위대한 장군이라는 사실을 주입식으로 교육받았을 뿐, 그의 활약상에 대해 제대로 알진 못했었다. 물론 당시에도 그의 일생을 다룬 위인전은 많이 있었지만 내심 다 안다고 생각해 재미없을 거란 선입견 탓에 손이 잘 가질 않았다.

그러다 2014년 여름, 드디어 영화 <명량>을 만나게 됐다. 한 마디로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 충격은 제대로 모르고 지낸 것에 대한 일종의 죄송함이었다. 해서 난 영화를 본 뒤 이순신 장군에 대해 낱낱이 찾아보게 됐고, 이런 사실까지 접하게 됐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최강 발틱함대를 궤멸시키며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 제독 ‘도고 헤이아아치로’는 승전 후 벌어진 축하연에서 한 기자로부터 질문을 받게 됐다. 먼저 그 기자는 세계 4대 해전 가운데 하나인 트라팔가 해전에서 스페인 무적함대를 무찌른 영국의 ‘넬슨’ 제독과 ‘도고’ 자신을 비교하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도고 제독은 이렇게 말한다. “넬슨은 프랑스의 나폴레옹 함대와 비슷한 수준의 함대를 가지고 싸워 이겼다. 그러나 나와 나의 함대는 러시아 발틱 함대의 3분의 1 규모였지만 결국 승리했다”며 사실상 자신이 넬슨보다 우위에 있음을 과시했다. 내친 김에 기자는 조선의 이순신 제독과 비교하는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그 질문에 도고 제독은 대뜸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를 이순신 제독에 비교하지 말라. 이순신 제독은 국가의 지원도 제대로 받지 않고, 훨씬 더 나쁜 상황에서 매번 승리를 이끌어냈다. 나를 전쟁의 신이자 바다의 신이신 이순신 제독에게 비유하는 것은 신(神)에 대한 모독이다.”

적이 인정하는 장군이라니. 그랬다. 영화 <명량> 이후 이순신 장군은 더 이상 이소룡과 동급이 아니게 됐고, 이번에 개봉한 <한산:용의 출현>을 보고는 이순신 장군이 아닌 ‘이.순.신’ 장군이 됐다. 특히 그가 학익진(鶴翼陣)을 그릴 때의 장면이 너무 좋았는데 김한민 감독이 왜 이번 편에선 ‘박해일’이라는 배우를 썼는지 잘 알겠더라. 명량해전이 살신성인(殺身成仁)하는 이순신 장군이었다면 이번 한산대첩에선 지략가로서 장군의 면모가 돋보이는데 스마트한 풍모의 박해일은 최적의 선택이었다는 생각이다. 또 개조된 구선(거북선)이 전장의 한 복판에서 슈퍼히어로처럼 등장할 땐 눈물 날 뻔 했다. 장군님 만세다.

그나저나 <날아라 슈퍼보드>에서 어부바맨으로부터 ‘이순신 장군’을 추천받은 손오공은 어떻게 변했는지 안 궁금하세요? 에이. 궁금하잖아. 바로 이상하게 생긴 철괴물로 변해 순식간에 요괴들을 닥치는 대로 다 집어 삼켜버린다. 이후에도 그는 위기의 상황에선 종종 이순신 장군으로 변해 모든 적들을 올킬 시켜버린다. 바로 천하무적이었다. 참고로 일본의 도고 제독은 그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더 보탰다고 한다. “이순신 제독에 비하면 나는 일개 하사관에 불과하다. 만일 이순신 제독이 나의 함대를 갖고 있었다면 세계의 바다를 제패했을 것이다.” 논쟁은 좀 있지만 임진왜란을 거쳐 정유재란까지 이순신 장군은 왜군과 붙어 23전 23승을 거뒀다고 한다. 이쯤 되면 이제 빵 터져 웃을 일이 아니다. 어부바맨이 옳았다. 2022년 7월 27일. 러닝타임 129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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