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을 달려봐 - 다시 여름
여름밤을 달려봐 - 다시 여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2.07.14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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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여름밤을 달려봐'의 한 장면.
영화 '여름밤을 달려봐'의 한 장면.

사계절 중 여름을 가장 좋아하는데 누군가 그 이유를 물을 때마다 "포용력 때문"이라는 다소 황당한 답변을 해왔었다. 여름밤엔 밖에서 자도 안 죽으니까. 한 낮엔 뜨거운 태양으로 인해 일사병에 걸려 죽을 수도 있는데 이상하게 여름밤은 다른 계절에 비해 우리 인간들에게 관대해 보였던 것. 하긴, 아주 어렸을 적에 여름이면 세 들어 살던 집 주인 형들과 마당 평상에 모기장 쳐놓고 별을 보며 잤던 추억이 있으니까. 

그렇다. 분명 여름밤은 특별하다. 흔히들 '열대야'라는 짜증 섞인 단어로 쉽게 치부해버리지만 적도 부근도 아닌데 밤에 밖에서 자도 별 탈 없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많은 돈을 들여 적도 부근으로 해외여행도 가는 마당에 여름이면 우리 한반도도 자연스레 적도 부근의 나라로 바뀌니 생각만 달리하면 감지덕지한 일이지 싶다. 일산해수욕장(울산 동구에 있는 도심해수욕장)에 괜히 야자수 나무가 심겨진 게 아니다. 그러니까 여름이면 해외여행을 간 것도 아닌데 세상이 온통 적도의 휴양지로 변한다는 말씀. 과학적으로도 지축이 23.5도로 기울어져 있어 한반도의 여름은 평상시의 적도처럼 태양이 수직으로 비춘다고 한다. 해서 난 여름만 되면 이유 없이 들뜬다. 특히 7월 중순부터 8월 초까지는 딱히 여름휴가를 안 가도 그냥 매일 매일이 휴가 같다. 좀 또라이 같죠? 히히. 

다시 여름밤 이야기로 돌아와 내 어릴 적 여름밤엔 동네 아이들 누구 할 것 없이 잠을 잘 안 잤다. 아파트가 귀했던 그 시절, 동네 친구들은 한 낮의 찜통더위를 피해 밤만 되면 기어 나와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같이 놀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이지 축제가 따로 없었다. 그러다 밤 11시를 넘겨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가 찬물 몇 바가지 뒤집어쓴 뒤 잠이 들곤 했는데 이 영화 <여름밤을 달려봐>를 보다보니 그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더라. 두 주인공 오든(에마 파사로)과 일라이(벨몬트 카멜리)도 잠 못 이루는 여름밤에 서로를 알게 돼 친해졌고, 제목 그대로 함께 여름밤을 달리며 서로를 알아갔던 것. 

하지만 사실 둘은 각자 상처가 있었는데 그 탓에 잠을 자고 싶어도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먼저 오든의 상처는 부모님의 이혼이었는데 이혼하기 전 자주 싸웠던 아빠엄마를 말리기 위해 밤늦게까지 깨어있었던 게 트라우마가 되어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지금도 늦은 밤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깨어 있었다. 결국 부모님은 이혼을 하게 됐고, 여태 범생이(모범생)로 살았던 자신이 싫어 올 여름엔 색다른 경험을 하기 위해 엄마를 남겨둔 채 아빠(더모트 멀로니)와 새엄마(게이트 보스워스)가 살고 있는 해안가 작은 도시 콜비로 오게 됐다.  

한편 일라이는 원래 BMX(변속장치가 없는 소형의 자전거를 이용해서 프리스타일 곡예를 수행하는 스포츠) 선수였다. 하지만 팀을 이뤘던 친구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면서 지금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운전대를 자신이 잡았었기 때문. 그러니까 같이 사고를 당했는데 자신은 살고 친구는 죽고 말았다. 그 상처로 일라이는 BMX 출전을 접었고, 잠 못 이루는 밤 바닷가 근처에서 혼자 자전거를 타다 역시나 잠 못 이루고 있던 오든을 만나게 됐다. 
상처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여름엔 유난히 상처가 많을 수밖에 없다. 날은 덥고, 해서 놀기로 작정한 청춘들의 마음은 어느새 개방형으로 바뀌기 때문. 인간에게도 동물이나 곤충들처럼 짝짓기 시즌이 있다면 이때가 아닐까. 

허나 마음이란 건 준 만큼 언제든 상처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뜨거운 여름을 지나 가을과 겨울, 혹은 봄이 되면 여름에 쉽게 줬던 그 마음이 언제고 무거운 상처로 되돌아오곤 한다. 원래 그렇다. 올라갔으면 내려가게 되듯 뜨거워졌으면 언젠가 차가워질 수밖에 없다. 그렇듯 인생의 비밀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하지만 젊음이 좋은 건 차고 차여도 뜨거운 여름은 다시 오기 마련. 가을과 겨울을 지나 봄이 되면 여름이 일찌감치 마중 나와 기다린다. 그러니까 상처만 있는 게 아니라는 뜻. 상처 다음에는 '치유'라는 계절이 다가오기 마련이다. 사람 때문에 힘들지만 결국 사람 때문에 다시 살게 된다. 상처 때문에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던 오든과 일라이도 잠 못 이루는 여름밤을 함께 달리며 서로를 치유해갔다. 해서 영화의 끄트머리에서 아주 간만에 깊은 잠을 자고 아침에 눈을 뜬 오든을 보고 새엄마가 좋아하는 모습은 이 영화의 백미다. 

불가의 가르침 중에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示空 空卽示色)'이란 게 있다. 색(色)이 공(空)이고, 공(空)이 색(色)이라는 것. 즉 있는 게 없는 거고, 없는 게 있는 거라는 이야기다. 학창 시절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라는 시(詩)를 통해 배울 땐 어렵기만 했는데 요즘은 조금 알 것도 갔다. 결국은 여름이라고 여름이 아니고, 겨울이라고 겨울이 아니라는 게 아닐까. 좋다고 좋은 게 아니고 나쁘다고 나쁜 게 아니라는 것. 우주만물은 계속 변하니까. 해서 중요한 건 여름밤엔 달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 못 즐기면 바보지. 어라. 그러고 보니 오늘이 7월 중순의 중순인 7월 15일이네. 다시 시작된 거다. 적도의 여름이. 으흐흐흐. 2022년 5월 6일 넷플릭스 개봉. 107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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