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탑건:매버릭’-청춘, 창공, 톰형, 그리고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을 위해
영화 ‘탑건:매버릭’-청춘, 창공, 톰형, 그리고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을 위해
  • 이상길
  • 승인 2022.06.30 22: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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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탑건:매버릭'의 한 장면.
영화 '탑건:매버릭'의 한 장면.

 

-스포일러가 있는 글입니다.-

<탑건>의 속편이라니. ‘이게 웬 떡이냐’는 심정으로 상영관을 찾은 그날 밤, 전날 마신 술로 피곤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지만 불이 꺼지고 스크린이 환하게 열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정신이 또렷해졌다. 그리고 시작되는 <탑건:매버릭>의 오프닝. 예상은 했었지만 36년 전 <탑건>의 전설적인 오프닝과 거의 같았는데 그 때문이었을까. 스크린을 응시하던 눈은 어느덧 30여 년 전 그때 그 시절로 잠시 돌아가게 됐다.

사실 내 또래에 <탑건>이라는 영화는 전설을 넘어 그냥 ‘청춘’ 그 자체다. 그러니까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과 동급인 셈. 하지만 아쉽게도 난 <영웅본색>도, <탑건>도 극장에서 보지 못하고, 뒤늦게 비디오로 봤었다. 그 시절의 극장은 지금처럼 가깝지가 않았다. 당시 극장에 간다는 건 1년에 두 번 정도 가는 소풍 같았던 것. 아무튼 <탑건>은 비디오로 봐도 충분했다. 아니, 아직 스무살도 안 된 나이였지만 단순 재미와 감동을 넘어 ‘훗날 이 영화는 전설로 남겠구나. 나에게든, 사람들에게든’이라는 생각까지 했었다. 어린 나이에도 ‘탑건’이라는 제목의 강렬함과 톰 크루즈, 그리고 황홀한 OST의 매력을 한 눈에 알아본 것. 하지만 무엇보다 그곳엔 ‘창공’이 있었다. 빽빽하게 차들로 들어차 버스를 타고 매일 다녔던 도로가 그 시절 대학입시를 위해 밤늦게까지 단체로 자율학습을 강요받았던 삭막한 교실이었다면 여백으로 가득 찬 창공은 그야말로 ‘자유’이자 ‘가능성’이었던 것. 바로 ‘청춘’이었다.

‘Top Gun Anthem’에서 ‘Danger Zone’으로 이어지는 오프닝곡에 취해 그 시절의 향수에 잠시 젖었던 눈은 어느 덧 주인공 매버릭(톰 크루즈)의 등장으로 스크린으로 다시 돌아왔고, 타임머신에서 내린 뒤 바라 본 매버릭의 달라진 모습에 탄식이 절로 터져 나왔다. 깊게 패인 주름 뒤로 청춘의 특권인 이유 없는 반항기가 사라진 그에게 남은 건 이제 중년의 차분함과 기품뿐. 순간 이렇게 생각했다. ‘내 청춘도 저렇게 사라져갔구나’

그랬거나 말거나 영화 속에선 마하 10의 속도를 자랑하는 5세대 전투기가 광속을 내뿜으며 창공을 내달렸고, 탑건의 교관이 된 매버릭의 시선 아래에선 새파란 청춘들이 존경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무렵, 누군가와 문자를 주고받는 매버릭. 상대는 바로 해군 제독이 된 아이스맨(발 킬머)이었다. ‘에이 설마 그가 등장하겠어’라는 생각이었는데 진짜로 등장해버리더라. 하지만 그 역시 예전의 거만하고 독기 서린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시종일관 온화한 노인의 미소로 매버릭을 바라봤다. 게다가 후두암에 걸려 말도 제대로 못 했다. 더 슬픈 건 그도 잠시 뒤 그 세계에서 사라져버리더라는 것.

그 즈음, 난 예감했다. 30여 년 전 비디오로 처음 봤을 때 귀에 착착 감겼던 ‘Mighty Wings’와 ‘Take My Breath Away’라는 곡은 나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걸. 아니 나올 수가 없겠더라. 그리고 내 예감은 적중했다. 분명 그래서였을 거다. 후반부에 F-14 톰캣이 유물처럼 등장한 뒤 휘몰아치는 활공 액션 속에서도 마음은 오히려 차분해져만 갔다.

영화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뒤 마치 정해진 수순처럼 난 30여전 비디오로 봤던 <탑건>을 다시 보게 됐다. 그리고 불과 30여분 전과는 너무도 다른 30여 년 전의 세상은 다시 보는 내내 내게 이렇게 속삭였다. “사라짐을 인정하라”고. 그랬다. 그랬던 거였다. <탑건:매버릭>은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적어도 내겐. 이젠 교관으로서 36년 전과 같이 탑건 스쿨로 가면서 톰형은 그 때처럼 다시 항공 점퍼에 라이방 선글라스, 또 바이크를 탄 채 이륙하는 전투기를 보며 주목을 불끈 쥐지만 쓸쓸하기만 했다. ‘Danger Zone’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아니 흘러나왔으면 오히려 이상할 뻔 했다.

따지고 보면 30여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내가 한 일이라곤 30여년에 걸쳐 가졌던 그 수많은 ‘지금’들을 흘려보낸 것뿐. 그렇듯 ‘지금’이 가장 잘하는 건 늘 사라지는 거다. 막을 수도, 조절할 수도 없다. 해서 무인 전투기 시대가 도래한 지금, 케인(애드 해리스) 제독은 교관으로서 다시 탑건 스쿨로 가는 매버릭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자네들(파일럿)도 언젠가는 다 사라지게 될 거야.” 그러자 매버릭은 대답한다. “Maybe so, sir. But not today.(아마도 그럴 겁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닙니다.)” 그러니 부디 오늘 하루도 좋은 날 되시길. 얼마 남지 않은 치약을 꾹꾹 눌러 짜내 쓰듯 악착같이. 행복은 권리가 아니라 의무니까.

2022년 6월 22일 개봉. 러닝타임 130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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