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파 열매 익어가는 6월이면
비파 열매 익어가는 6월이면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2.06.21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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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랗게 익어가는 비파를 볼 때면 성세빈 선생(1893~1938) 생가 마당에 있던 비파가 떠오른다. 조롱조롱 알알이 영글어간다는 신호인 듯 까만 배꼽을 드러내는 비파. 잎의 모양이 비파를 닮아서 그렇게 불렀다는 비파를 만나러 간다.

일산해수욕장 모래 위 발자국을 따라 걷다 보면 보성학교 전시관이 보인다. 옥상 난간에는 흰 두루마기를 입고 책을 읽고 있는 이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전시관 모서리에 달린 종이 곧 울릴 것만 같다. 벽면에는 학교 운동장에서 찍은 단체사진 속 아이들이 뛰쳐나올 것만 같다.

‘널리 열어 사람다움을 이루다’는 뜻의 ‘보성(普成)’은 고종황제가 최초의 사립 전문학교에 내린 이름이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 학교는 온데간데없고 옛 모습과는 다른 사각형 건물이 들어섰지만, ‘항일독립운동의 터전’과 ‘보성’이란 이름은 남아 있다.

전시관에는 보성학교를 중심으로 동구 항일운동 역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성세빈 선생의 생애, 유품인 탁자와 반닫이, 호롱불을 비롯해 보성학교 졸업대장(복사본)과 사립 보성강습소 졸업증서, 1920~1930년대 항일독립운동 관련 자료들을 본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울산 동면의 소년운동과 청년운동, 일제 수탈에 맞선 동구 주민의 활약상도 고스란히 담겨있다.

성세빈 선생의 유품을 만나니 선생을 뵌 듯 반갑다. 유품을 보면서 유품의 이름과 설명문구가 붙어 있지 않아 아쉬웠다. 반닫이와 호롱불 탁자가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자라나는 세대들은 알 수 없는 물건들이다. 선생의 추억 한 토막을 곁들여 기록해 두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학교전시관이 보여주기 위한 공간에 머물지 않고, 느끼며 공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1910년대 동구에는 방어진을 중심으로 집단 이주해온 일본인들에 의해 어업기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1920년대 동구에는 당시 울산읍내보다 5배나 많은 일본인이 살아 일제 주재소와 일본인 학교가 들어섰다. 일본인들은 어업을 독차지하고 조선인 어부들을 억압했다. 경제적 수탈과 강압 통치가 집중된 동구에는 보성학교가 민족학교의 중심이었다.

항일독립운동의 터전인 보성학교는 1909년에 설립됐다가 일제 탄압과 재정문제 등으로 1912년에 폐교되었으나 성세빈 선생이 사재를 털고 주민들이 성금을 모아 1920년에 다시 열었다. 일본인들에게 밀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던 당시 동구지역 학생들에게 글자와 학문을 가르치며 민족정신을 드높였다. 교육과 항일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자 일제는 1929년에 폐쇄 명령을 내렸으나 교장인 성세빈 선생이 물러나는 것으로 폐쇄는 막았다. 1922년 개교해서 1945년 강제 폐쇄될 때까지 21회에 걸쳐 499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성세빈 선생은 46세에 사망했다. 주민과 졸업생들이 그의 공덕을 기리는 송덕비를 생가에 세웠는데 현재는 보성학교 전시관 야외마당으로 옮겨졌다. 성세빈 선생의 생가는 전시관에서 150미터 거리에 있다. 마당에는 비파 두 그루가 익어가고 있다. 성세빈 초대 교장의 손자인 성낙진 씨의 말이 긴 여운을 남긴다.

“할머니는 늘 할아버지가 아끼던 비파나무를 잘 돌보라고 하셨어요. 그 당시 손님이 오시면 대접하기도 했고, 가족들의 양식으로 대신하기도 했어요. 정원에 있는 비파나무는 할아버지가 키우던 나무는 아니에요. 어느 날 아끼던 나무가 갑자기 죽어서 사다 심었는데, 몇 번 실패 끝에 살아남은 나무에요. 비파나무는 비바람에 넘어져도 다시 일으켜 세우면 잘 견디었어요. 쓰러져도 일어나는 것이 할아버지를 뵙는듯해요.”

역사의 지식은 책이나 검색을 통해 알 수 있다. 하지만 아끼는 물건, 좋아하는 과일이나 습관 같은, 오랜 시간 함께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사소한 것들도 있다. 가끔은 사소한 것을 알아갈 때 지혜가 되기도 한다. 그리움은 힘이 되어 마음을 움직이기도 한다. 사람은 떠났어도 비파 열매가 익어가듯 그리움은 오래도록 떠나지 않는다.

김뱅상 시인, 현대중공업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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