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인의 죽음
어느 시인의 죽음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2.05.10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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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봄은 좀 유난스럽다 싶은 느낌이다. 초봄부터 늦봄까지 적지 않은 별들이 잇따라 스러져 갔으니…. 평론가 이어령(2.26)에 이어 작가 이외수(4.25)가 지더니 배우 강수연(5.7)과 시인 김지하(5.8)가 앞을 다투듯 그 뒤를 이었다. 향년(享年)으로 치면 89세(이어령), 76세(이외수), 55세(강수연), 81세(김지하)였다.

이들 가운데서도 여운(餘韻)의 그림자가 가장 길게 드리워진 이는 시인 김지하(金芝河, 1941.2.4.~2022.5.8)가 아닐까 싶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의 사위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어쩌면 그의 남달리 감성적인 작품과 유난히 굴곡진 삶 때문인지도 모른다. 필자로서도 내연(內緣)이 깊었던 이는 김지하였다.

그와의 연은 1970년 5월 <思想界(사상계)> 5월호에 실린 그의 담시(譚詩=이야기詩) <오적(五賊)>이 맺어주었다. 여기서 ‘오적’이란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가리킨다. 혹자는 ‘오적’을 ‘일제 통치의 수혜 특권층’이라 풀이한다. <오적>이 겨냥한 과녁이 ‘일제 잔재의 완전청산’이었다는 이야기다.

200자 원고지 40장 분량으로 18쪽에 걸쳐 실린 이 장시(長詩)는 ‘오적 필화(筆禍)사건’을 낳았고, 그 파문은 그해 9월 <사상계> 폐간과 편집인 구속(‘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은 김지하를 졸지에 스타덤(stardom)에 올려놓는 발판이 된다. ‘김지하’라는 젊은 시인을 ‘세계적 체제저항 시인’으로 띄워준 것이다.

그 뒤 필자는 한동안 ‘살아있는 유령’ 김지하의 포로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더욱이 5년 뒤(1975년)에 꺼내 든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는 그를 맹신(盲信)으로 이끌고 만다. 내친김에, 역대 군사정권 시절 ‘분노의 술안주’이자 ‘민중가요 노랫말의 윗자리’를 차지했던 그 시구(詩句) 몇 줄을 다시 소환해 본다.

“신새벽 뒷골목에/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오직 한 가닥 있어/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떨리는 치 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백묵으로 서툰 솜씨로/쓴다/숨죽여 흐느끼며/네 이름 남몰래 쓴다/타는 목마름으로/타는 목마름으로/민주주의여 만세”

그러나 김지하가 <오적>을 발표한 지 21년 뒤, 그를 아끼던 많은 이들은 그의 가슴에 ‘변절자(變節者)’란 주홍글씨 새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조선일보에 기고한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는 칼럼이 화근이었다. 그중 몇 조각을 잘라서 보자. “…젊은 벗들! 나는 너스레를 좋아하지 않는다. 잘라 말하겠다. 지금 곧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그리고 그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 당신들은 잘못 들어서고 있다. 그것도 크게!…”

시침을 잠시 1991년 5월로 되돌려놓는다. 그 무렵은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경찰에 맞아 숨지고 이에 항의하는 분신자살이 잇따르던 격동의 시기였다. 그리고 한 해 뒤 그는 박근혜 대선 후보의 열렬한 지지자로 이름표를 갈아 단다.

“말도, 글도 남기지 못하셨지만, 눈을 깜빡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게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장례식장 빈소에서 고인의 둘째 아들(김세희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이 취재진에게 전한 말이다. 언론은 그의 죽음을 ‘별세(別世)’라고 표현했다. ‘프란치스코’란 세례명을 건네준 천주교에서는 그의 죽음을 ‘선종(善終)’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에게 ‘변절’의 낙인을 찍게 만든 온갖 뒷말도 가슴에 묻기로 한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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