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썸머85’-그 여름 바닷가, 내 가장 크고 찬란한 죄악
영화 ‘썸머85’-그 여름 바닷가, 내 가장 크고 찬란한 죄악
  • 이상길
  • 승인 2022.04.21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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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썸머85'의 한 장면.
영화 '썸머85'의 한 장면.

 

사랑을 색(色)으로 표현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핑크나 레드를 떠올린다. 분명 남녀 간의 달콤하고 뜨거운 사랑은 분홍이나 빨강 말고는 딱히 어울리는 색이 없어 보인다. 허나 그건 단편적인 시각으로 사랑을 바라봤을 때의 이야기이고, 좀 더 길게 봤을 때 사랑과 진짜 잘 어울리는 색은 따로 있다. 바로 블루다. 엥? 시퍼런 ‘블루’가 어떻게 감히 사랑과 어울릴 수가 있냐고요? 사랑이 그렇게 차갑냐고요? 미안하지만 불이 가장 뜨거울 때의 색은 파랑이다. 가스레인지 불을 생각해보시길. 그러니까 겉으로 보기엔 차가워 보이는 파랑이지만 블루는 가장 뜨거운 색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블루가 시각적으로 엄청 차가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 그러다 보니 골 때리는 게 핑크와 빨강의 보색(반대색)은 또 파랑 계열이라는 것. 다시 말해 시각적으로 뜨거워 보이는 빨강 계열의 색과 대조를 이루는 건 정작 불이 가장 뜨거울 때 나타나는 파랑 계열이라는 이야기다. 이쯤 되면 이런 말이 절로 튀어 나온다. “블루, 넌 대체 정체가 뭐냐?”

뭐 어찌됐든 사랑은 결코 핑크나 레드가 아니다. 그것은 블루다. 사랑에 빠져 서로 좋을 때야 분명 핑크나 레드지만 어디 사랑이 영원하던가? 아무리 물을 뜨겁게 끓여도 시간이 지나면 식어버리듯 아무리 뜨거웠던 사랑이라도 시간의 화염 속에선 결국 재(灰)가 되어 차갑게 흩어진다. 파랗게 뜨거웠다가 이내 시리도록 파래지는 블루는 사랑의 전부다. 시작과 끝이다.

한편 동성애를 다룬 퀴어 영화가 유독 블루를 선호하는 이유도 바로 파랑의 이 같은 이중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대표적으로 <가장 따뜻한 색, 블루>를 비롯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등등 퀴어 영화에는 거의 예외 없이 파랑이 배경으로 자주 등장한다. 동성애자가 아닌 대다수 관객들이 보기에 그들의 사랑은 평범하지 않아 파랑처럼 왠지 시려 보이지만 정작 자신들은 파랗게 뜨겁기 때문. 허나 그들의 사랑도 시간의 화염을 견딜 순 없기에 결국엔 시린 파랑으로 남게 된다. 그리고 또 한편의 퀴어 영화인 <썸머85>는 사랑이 끝이 나 차갑게 변해버린 그 파랑이 그저 차갑고 시리기만 할까라고 묻는다.

<썸머85>에서 알렉스(펠릭스 르페브르)는 바다에 빠진 자신을 구해준 일을 계기로 다비드(벤자민 부아쟁)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헌데 나이가 좀 더 많았던 다비드는 사실 양성애자였고,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다비드의 매력에 알렉스가 점점 빠져들면서 둘은 결국 연인이 된다. 알렉스에겐 첫사랑이었고, 그들을 둘러싼 하늘과 바다만큼이나 둘은 파랗게 뜨거웠다.

허나 그들의 사랑도 케이트(필리핀 벨즈)의 등장으로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케이트와 자고 온 다음 날 파란색 청자켓을 입은 채 화가 나 쏘아붙이는 알렉스를 향해 다비드가 말한다. “진실을 알고 싶어? 그냥 니가 지겨워졌어. 난 변화가 좋아. 하지만 넌 나만 원했지. 그건 불가능해. 미안해.” 파란색 면티를 입은 다비드는 그렇게 말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 때문이었을까. 화가 난 알렉스가 뛰쳐나간 뒤 다비드는 그와 함께 탔던 오토바이를 혼자 타고 질주하다 마치 자신의 죄에 용서를 구하듯 교통사고를 당해 죽음을 맞이한다. 다비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충격에 빠진 알렉스. 그는 이제 뜨거웠던 파랑의 시절, 다비드와 했던 약속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 약속은 바로 먼저 죽은 사람의 무덤 위에서 춤을 추는 것.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애를 써가면서 그는 점점 다비드를 이해하게 된다. 차갑게 식은 다비드가 왜 그날 파란색 면티를 입은 채 눈물을 흘렸는지. 설마 그 눈물까지 차가웠을까. 사랑은 결코 영원할 수 없다. 그것은 그저 기록될 뿐이다. 그 순간이 영원히.

한참 뜨거웠던 시절 다비드는 알렉스에게 랭보와 베를렌의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프랑스의 두 천재 시인으로 베를렌은 아름답고 젊은 아내를 두고 어린 랭보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다비드와 알렉스처럼 둘 다 남자였고, 당시 프랑스 문학계를 뒤흔들었던 둘의 요란한 사랑은 화가 난 베를렌이 랭보를 향해 쏜 총이 그의 한쪽 손을 관통하면서 종말을 맞는다. 이런 둘의 실제 사랑을 영화로 만든 게 바로 <토탈 이클립스>고, 랭보(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세상을 뜬 뒤 베를렌(데이빗 듈리스)은 그를 위해 이런 시(詩)를 썼다. “내 가장 크고 찬란한 죄악. 우린 행복했다. 항상” 2020년 12월 24일 러닝타임 101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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