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폭격’-전쟁, 악마가 내려앉다
영화 ‘폭격’-전쟁, 악마가 내려앉다
  • 이상길
  • 승인 2022.04.14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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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폭격'의 한 장면.
영화 '폭격'의 한 장면.

 

스포일러가 심각한 글입니다.

영화의 배경은 1945년 3월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이었다. 2차 세계대전의 끝이 막 보이기 시작할 무렵이었지만 덴마크는 여전히 독일 나치 치하에 있었고, 그곳 레지스탕스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비밀리에 작전을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코펜하겐의 게슈타포(나치 정권의 비밀국가경찰)는 철저하게 레지스탕스를 잡아냈고, 심지어 자신들의 기지에 그들을 포로로 잡아 인간방패를 만들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폭격>은 이렇게 시작된다.

잠시 뒤 소년 헨리가 등장한다. 심부름을 갔다 오던 헨리는 길에서 전투기의 공격으로 처참하게 부서진 차량을 보게 된다. 그 안에는 결혼식을 향해 가던 신부와 가족들의 처참한 주검이 있었고, 그 끔찍한 광경이 트라우마가 되어 헨리는 그만 실어증에 걸리게 된다. 얼마 후 헨리는 치료를 위해 코펜하겐의 친척집에 맡겨지고, 그곳에서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사촌 리모어와 함께 수녀원이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게 된다.

리모어는 자신의 친구 에바도 사람이 죽는 걸 봤지만 말을 잘 한다며 헨리를 다독거렸다. 실제로 에바는 얼마 전 자신의 눈앞에서 총에 맞고 죽는 사람을 봤었다. 헌데 남들은 에바가 멀쩡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에바는 남들에게 말 못할 트라우마에 몰래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에바의 눈앞에서 죽은 사람은 프레드릭의 친구였다. 하지만 그는 친구를 지켜주지 못했는데 자신이 바로 게슈타포의 앞잡이였기 때문. 그런 아들을 아버지는 부끄러워했고, 프레드릭 역시 독일의 패전이 가까워오면서 점점 불안해져만 갔다.

한편 헨리와 리모어, 에바가 다니는 수녀원에는 테레사라는 수녀가 있었다. 그런데 테레사는 지금 신앙이 몹시 흔들리고 있다. 그도 그럴 만한 게 2차 세계대전으로 인류가 이토록 고통 받고 있는데 그분(神)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기 때문. 해서 그녀는 그분을 알현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학대를 가하는가 하면 게슈타포의 앞잡이인 프레드릭에게 “당신은 악마입니까”라고 물은 뒤 십자가 아래에서 키스를 해버린다. 그분이 계신다면 그런 자신을 보고 분명 피눈물을 흘리실 거라 생각했던 것. 허나 그분은 흘리지 않으셨다.

실존주의(實存主義)라는 철학사조가 있다.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류가 그토록 엄청난 고통을 겪는데도 침묵과 방관으로 일관했던 그분에 대한 회의에서 생겨났던 것. 해서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그냥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라고. 정말 우리는 이 우주에 우연히 생겨난 존재일 뿐인 것일까?

허나 이후 테레사가 겪는 현실은 그보다 더 기가 막혔다. 영국 공군이 코펜하겐에 있는 게슈타포 본부를 폭격하기로 결정하고 폭격기가 출동하게 되는데 표적이 잘못돼 그만 옆에 있는 수녀원 학교 건물로도 포탄을 날려버린 것. 당시 수녀원 학교에선 100명이 넘는 아이들이 연극 수업 중이었고, 폭격으로 건물이 부셔지자 테레사는 아이들을 데리고 건물 지하실로 대피한다. 독일 폭격기의 공격으로 생각했던 것. 그러면 안 됐었는데. 그냥 밖으로 나갔어야 했는데. 결국 포탄 한 발이 학교 건물로 제대로 떨어졌고, 테레사를 비롯한 수녀들과 백 명이 넘는 아이들은 잿더미가 된 건물에 깔려버린다.

헌데 프레드릭은 테레사의 키스로 그녀를 사랑하게 됐고, 폭격으로 학교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제일 먼저 무너진 건물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다행히 테레사는 목숨을 잃을 정도로 크게 다치진 않았는데 자신보다 더 아래에 깔린 어린 리모어는 건물 철근이 머리를 관통한 채 아직 살아 테레사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테레사는 리모어가 정신을 잃지 않게 계속 말을 시키고 있었고, 사람들이 구하러 올 거라며 희망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누군가가 내려와 테레사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바로 프레드릭이었던 것. 그러니까 악마가 구하러 온 것이었다. 아니 그분의 손길이 가장 절실한 순간에 정작 손을 내민 건 악마였던 것. 그 순간, 프레드릭을 바라보는 테레사의 눈빛은 이 영화의 백미다.

한편 길거리에서 게슈타포에 의해 총살당한 사람을 목격한 뒤 죽음의 트라우마에 남몰래 시달렸던 에바는 그날 아침 속이 안 좋아 아침을 먹지 않았고, 그 일로 엄마아빠는 에바를 호되게 야단쳤다. 심지어 “밥을 안 먹으면 죽는다”는 말까지 했다. 수녀원 학교에 와서는 할머니 수녀로부터도 “아침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말을 듣게 된 에바. 화장실에 가기 위해 교실을 빠져나온 에바는 더욱 불안해한다. 그 순간, 아군의 폭격으로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에바는 테레사 수녀가 이끈 일행과 달리 지하가 아닌 건물 바깥으로 나온다. 마치 세월호 참사 때 선생님의 통제에 따르지 않고, 갑판 위로 올라온 아이들처럼. 바깥으로 나온 뒤 다가오는 폭격기를 올려다보는 에바. 악마가 내려앉을 걸 예감했을까. 이내 에바는 새침해진 표정으로 아예 학교를 빠져나오기 시작한다. 선생님 허락도 안 받고. 그랬다. 어린 소녀는 삐치고 말았다. 미친 세상에. 학교를 빠져 나온 에바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아침을 먹으로. 살기 위해. 2022년 3월 9일 넷플릭스 개봉. 러닝타임 100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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