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행동의 ‘예견 가능성’
언어 행동의 ‘예견 가능성’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2.02.17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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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견 가능성’이라는 법률적 용어가 있다. 사전적 정의로는 ‘행위 당시의 상황에서, 행위자가 앞으로 일어날 결과에 대해 예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좀 더 일상적인 이야기로 옮겨 보면, 도로상에 그어진 노란색 중앙선을 두고 쌍방향으로 차들이 쌩쌩 달릴 수 있는 것도 건너편 차가 절대 넘어오지 않을 것이라는 예견 가능성을 우리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언어 행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같은 언어권 내에서는 이 언어 행동의 예견 가능성이 무리 없이 적용된다. 예를 들어 한국의 경우, 지각한 학생이 헐레벌떡 교실 문을 열면 선생님은 “지금이 몇 시야?”라고 질타를 보내고, 학생은 “죄송합니다. 알람이 안 울려서…….”라는 흔한 변명을 한다. 하지만 같은 상황에서 울산과학대학교 한국어 어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외국인 유학생들은 “9시 20분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언어권이 다른 두 학생의 다름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

한국인의 언어 행동은 주변 국가인 일본이나 중국과 비교해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가톨릭대학의 강석우 교수, 일본 신슈대학의 오키 유코(沖裕子) 교수 등이 2010년에 일본에서 발표한 논문1)에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1) 논문 제목은 ‘日韓中の外言談話にみる発想と表現 (한중일 외언담화에서 보이는 발상과 표현)’]

한·중·일 대학생을 대상으로 지도교수에게 추천장을 의뢰하는 장면을 롤플레잉으로 관찰한 연구이다. 이 연구에 따르면 일본인 대학생은 추천장을 부탁한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꺼내지만 그 다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된다. 그 이유는 추천장이 필요한 이유, 제출 기한 등 학생이 직접 언급하기 어려운 정보를 지도교수가 자연스럽게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본인의 언어 행동을 ‘살피기’라고 한다. 상대방의 행동을 살펴서 부담을 경감시키는 협조형 커뮤니케이션이 수행된다. 이 때문에 일본인의 언어 행동을 ‘상대 배려적인 언어 행동’이라고 흔히 말한다.

이에 비해 중국인 대학생의 언어 행동 역시 중국인다움이 느껴진다. 중국인 대학생은 사전에 메일로 추천장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대면 상황에서 추천장이 필요한 이유를 재차 명시적으로 언급한다. 또한 상대를 번거롭게 한 데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사과를 전한다. 즉 명분을 중시하는 목표지향적인 언어 행동이다.

이쯤 되면 한국인 대학생의 언어 행동이 궁금해진다. 당연히 일본인 대학생과도 중국인 대학생과도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 논문에서 언급한 내용으로는 ‘잘 부탁드립니다.’, ‘실례합니다.’와 같은 정형적인 표현으로 대화를 마무리 짓기보다는 감사 표현이 쓰인다. 또한 “월요일에 가지러 오겠느냐?”라는 지도교수의 제안에 “월요일은 제가 학교에 안 오는데, 교수님 화요일에 찾으러 오면 안 될까요?”라고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솔직하게 발언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이 논문은 어디까지나 한·중·일의 문화에 적합하다고 여긴 대표적인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을 소개하는 것이 목적이나, 이는 극히 일례에 불과하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다만 이를 좀 더 일반화하면, 일본인은 상대방이 협조적으로 대화에 응해주지 않으면 커뮤니케이션에 어려움을 느낀다. 중국인은 예의와 명분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오해를 사기 쉽다. 한국인은 이 양쪽과는 달리 진심과 솔직함으로 있는 그대로를 표현한다. 이런 면이 돌출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K문화 콘텐츠이다.

어느 나라든 자국의 잣대로 다른 나라를 평가하거나 대응하려고 하지 않는다. 문화 상대주의에 따른 수용과 이해가 늘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K문화 콘텐츠를 가장 빨리 받아들이고 열광한 것도 일본과 중국이었다. 이 다름에서 오는 충격파는 매력적 요소이기도 하다.

이들 한·중·일 3국 사이에는 언어 행동의 예견 가능성이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국경의 의미가 무의미한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서로가 다를 수밖에 없는 언어 행동의 차이를 수용하는 지혜로운 자세의 필요성에 대해서 만큼은 모두가 같은 생각일 것이다.

박양순 울산과학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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