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킹메이커’-빛과 그림자, 그 지랄 맞은 관계에 관해
영화 ‘킹메이커’-빛과 그림자, 그 지랄 맞은 관계에 관해
  • 이상길
  • 승인 2022.02.10 23: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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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킹메이커'의 한 장면.
영화 '킹메이커'의 한 장면.

 

‘빛’과 ‘어둠’의 관계는 참으로 지랄 맞다. 딱 봐도 금세 각이 나오지만 선해 보이는 밝은 빛에 반해 어둠은 무지하게 악해 보인다. 해서 인류는 동굴에서 생활하던 시절부터 빛은 선(善)을, 어둠은 악(惡)이라고 봤다. 어두컴컴한 밤의 어둠 속에선 맹수의 습격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던 탓에 새벽이면 동쪽에서 솟구치는 밝은 빛은 마치 천사와도 같지 않았을까. 고대인들에게 태양신은 그렇게 생겨났다.

허나 그렇다고 어둠이 마냥 나쁘기만 할까. 까놓고 말해 잠을 잘 땐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자야 숙면이 가능해진다. 또 잠을 푹 자야 에너지가 보충돼 다음 날 활동성도 높아진다. 뭐 이런 고리타분한 시선 말고도 빛과 어둠을 선악구도에 맞춰 굳이 적대적인 관계로 볼 필요가 없는 게 빛과 어둠은 때론 서로를 돋보이게도 하기 때문. 그렇잖은가. 어둠이 짙을수록 빛의 존재는 더욱 부각되고, 동트기 전의 새벽이 가장 어둡다.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 어둠을 대표하는 악당 조커(히스 레저)도 범죄와 부패로 얼룩진 고담시에서 한줄기 빛이었던 영웅 배트맨(크리스찬 베일)에게 이런 말을 했더랬다. “You Complete Me(넌 나를 완성시켜)” 의역을 하자면 ‘영웅 노릇하는 배트맨 너가 있기 때문에 악당인 내가 비로소 완성돼’라는 의미가 아닐까. 그러니까 배트맨이라는 빛이 있어 어둠인 자신이 더욱 돋보인다는 뜻. 다 떠나 밤하늘의 우주도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공간이고, 그 둘이 서로 다투는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아니 다투고 있는 건가? 아 몰라! 대체 친구야? 적이야? 참 지랄 맞죠?

한편 살아 있는 한 인간에겐 누구나 그림자가 생기는 걸 피할 수가 없다. 그림자는 곧 어둠이고, 그 어둠 속엔 고통이나 상처, 혹은 남들 앞에 숨기고 싶어 하는 욕망이나 본능이 숨겨져 있다. 헌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건 정작 그 그림자는 생명의 근원인 태양 때문에 생긴다는 것. 또 태양이 강렬할수록 그림자는 더욱 짙어진다. 그리고 <킹메이커>에선 바로 이 ‘그림자’에 주목해야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한때 이 나라의 선거판을 뒤흔들었던 ‘엄창록’이라는 실존인물의 이야기를 담아낸 <킹메이커>는 옳고 그름, 즉 ‘그래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오랜 군부 독재에 맞섰던 민주화 투사로 건국 이후 최초로 정권교체를 이뤄낸 ‘김대중’이라는 정치거목 뒤에도 생길 수밖에 없었던 그림자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면서 우주만물의 이치를 초월하려는 인간의 의지를 비웃는다. 그리고 그 우주만물의 이치란 바로 태양이 강렬해질수록 그림자는 더욱 짙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늘 어둠(그림자)을 초월해 오로지 빛만을 추구하려 든다. 아니 스스로가 빛이라고까지 생각한다. 왜 다들 자기가 옳다고 하잖아. 그건 정치판에서 특히 심하기 마련. 허나 우린 모두 태양이 아니라 태양빛을 받는 피조물에 불과하다. 그림자가 생기는 걸 누구도 피할 순 없다는 이야기.

사실 영화에서도 잘 그려지지만 지금은 고인이 된 김대중이라는 정치거목이 있기까진 엄창록이라는 인물을 빼놓고는 말하기가 어렵다. 한때 김대중의 선거 책사였던 그가 있었기에 김대중은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던 경쟁자 김병삼 후보를 꺾고 전국구 정치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또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박정희의 간담을 써늘하게 했던 1971년 대선에서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 후보로 선출될 수 있었던 것도 엄창록의 뛰어난 지략이 있었다고 한다.

문제는 김대중의 정치철학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엄창록의 방식은 전혀 맞지 않았다는 것. 결국 둘의 어색한 밀월관계는 1971년 대선 직전 헤어지게 된다. 영화 속에서는 김대중 역의 김운범(설경구)이 엄창록 역의 서창대(이선균)에게 이런 말을 하며 결별을 고한다. 운범 뒤에서 그림자로 살던 창대는 그 동안의 공을 인정받아 출마를 준비하지만 그의 방식에 실망한 운범은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넨 정치를 해선 안 될 사람이야.” 이후 치러진 대선에선 처음으로 영호남 지역구도가 만들어지고, 선거에서도 운범은 패배하게 된다. 현실에서도 박정희는 가까스로 김대중을 꺾고 3선에 성공한 뒤 유신을 선포한다.

아이러니한 건 그렇게 만들어진 영호남 지역구도는 이후 이 나라 정치판의 고질적인 병이 되어버리고, 김대중 뒤를 이었던 노무현은 그런 지역구도 타파를 위해 평생을 싸우게 된다. 물론 김대중과 결별한 엄창록이 당시 박정희 캠프로 진짜 넘어갔는지, 또 그가 실제로 영호남 지역구도 전략을 만들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해서 영화는 가상의 결말을 통해 관객들에게 그저 이렇게 묻는다. “만약 운범이 태양만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의 그림자(창대)를 좀 더 이해했더라면 어땠을까? 결과론적으로는 말이지.” 2022년 1월 26일 개봉. 러닝타임 123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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