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트북’-완전한 사랑에 관해
영화 ‘노트북’-완전한 사랑에 관해
  • 이상길
  • 승인 2022.01.06 23: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 ‘노트북’의 한 장면.
영화 ‘노트북’의 한 장면.

 

영화가 시작되면 잠시 뒤 한 노년의 남자가 거울을 보며 빠질 데로 빠져버린 머리를 손질하며 이렇게 독백한다. “난 특별하지 않다. 그냥 상식적인 보통 사람이다. 보통의 삶을 살았고, 날 기리는 기념비도 없으며 내 이름은 곧 잊힐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누구 못지않게 훌륭히 해낸 일이 있다. 난 온 마음과 영혼으로 한 여인을 사랑했고, 그것만으로 나는 여한이 없다.”

노인의 이름은 노아(제임스 가너)였고, 그가 평생을 두고 사랑한 한 여인은 앨리(제나 로우랜즈)였다. 허나 지금 앨리는 치매에 걸린 상태여서 노아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런 앨리에게 노아는 그녀의 곁에서 노트북에 적힌 오래된 사랑이야기를 늘 들려주고 있었다. 바로 자신들의 이야기였지만 치매에 걸린 앨리는 그걸 알지 못한 채 누군가가 쓴 연애소설처럼 생각했다.

사랑이 어려운 건 연애소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애소설은 두 주인공이 가장 행복한 순간에 끝을 맺는 편이지만 현실에서의 사랑은 그렇지가 않다. 들뜨고 행복했던 순간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시간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물론 그것도 사랑의 한 모습이지만 탄력을 잃은 채 길게 누워버린 사랑 앞에 보통은 허탈과 좌절을 맛본다. 그때부턴 싸움의 무게도 다르다.

아무리 영화지만 노아와 앨리도 그런 시기가 있었을 터. 하지만 서로를 뜨겁게 사랑했던 젊은 시절 노아(라이언 고슬링)는 앨리(레이첼 맥아담스)와 또 다시 사랑싸움을 하면서 이런 말을 했었다. “우린 원래 그래. 내가 건방지게 굴면 넌 욕하고, 네가 생떼를 부리면 나도 욕해. 사실 넌 십중팔구 생떼를 부리지. 난 네 감정 건드리는 거 하나도 안 무서워. 순식간에 회복돼서 또 다시 생떼를 부리니까.”

사실 둘은 지난 여름 처음 만나 서로 뜨겁게 사랑했지만 부유했던 앨리 집안의 반대로 헤어졌다 지금 1년 만에 다시 만났다. 각자 만나는 사람까지 있었는데도 여태 남은 감정이 하룻밤 만에 폭발하고야 말았다. 앞서 노인의 노아가 말하지 않았던가. 온 마음과 영혼을 다해 앨리를 사랑했다고. 그건 앨리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앨리에겐 이미 부유한 집안의 약혼자가 있었고, 그에게 돌아가려는 앨리를 붙잡으며 노아는 계속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쉽진 않을 거야. 아주 힘들 거야. 매일 죽도록 싸우겠지만 사랑하니까 기꺼이 할래. 네 모든 걸 원해. 영원히. 매일 함께 하는 거야.”

‘사랑해’라는 말을 할 때 우린 자주 목적어를 생략한다. 보통 상대방을 직접 보면서 하거나 전화통화로 하다 보니 생략하는 게 더 자연스럽다. 그런데 사랑하는 그 순간이 아닌 영원의 관점에서 봤을 때 생략된 목적어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너’를 사랑하느냐, 아니면 ‘사랑에 빠져 행복한 나’를 사랑하느냐의 차이가 있기 때문. 물론 사랑에 빠진다는 건 둘 다겠지만 어느 쪽이 좀 더 강하냐에 따라 그 사랑의 모습이나 빛깔이 결정되지 않을까.

관련해 지난해 여름에 봤던 <레미니센스>라는 영화에서 여주인공 메이(레베카 퍼거슨)는 사랑하는 닉(휴 잭맨)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우리 같은 사람에게 사랑은 빠지는 게 아니라 늘 곤두박질치죠. 하지만 사랑이 그래선 안 돼요. 땅 속 깊고 어두운 곳으로 침몰하는 게 아니라 더 높고 밝은 곳으로 상승해야 해요.” 바로 노아와 앨리의 사랑이 그랬다.

그렇다. 사랑은 빠지는 게 아니라 ‘빠지고 난 뒤 해내는 게’ 아닐까. 더 높고 밝은 곳을 향해. 그래서 처음 뜨겁게 사랑할 때 했던 약속들을 지키는 것, 그건 그저 ‘상식’일 뿐이었던 거다. 이제 이 글의 첫 부분으로 다시 돌아가 노인이 된 노아의 독백을 다시 읽어보시길. 아마도 ‘상식’과 ‘훌륭히 해낸’이라는 단어들이 크게 들어올 거다. 그렇게 우린 사랑을 할 때 빠지는 데만 급급해 ‘상식’과 ‘사랑의 완성’에 대해선 얼마나 소홀하게 대해왔던가. 그랬다. 사랑에도 완성이라는 게 있었던 거다.

마침내 노인이 된 노아와 앨리는 한날 한 시에 같은 침대에 누워 삶을 마감하며 자신들의 아름다운 사랑을 완성하게 된다. ‘완전한 사랑’이었던 거다. 영화라서 가능한 사랑이야기일 뿐이라고요? 허나 어쩌죠? 이 영화 <노트북>은 실화다.

2004년 11월 26일 개봉. 러닝타임 123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