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저니스 엔드’-소년은 그렇게 잠들었다
영화 ‘저니스 엔드’-소년은 그렇게 잠들었다
  • 이상길
  • 승인 2021.12.30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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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저니스 엔드'의 한 장면.
영화 '저니스 엔드'의 한 장면.

 

스포일러가 있는 글입니다.

소년은 들떠 있었다. 이제 막 소위로 부임한 소년은 평상시라면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을 나이지만 지금은 전시인 탓에 소위 계급장을 달고 전선에 투입됐다. 그랬다. 때는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8년의 어느 이른 봄이었다. 소년의 이름은 지미(아사 버터필드)였고, 부임 후 그가 향한 곳은 프랑스 북부 전선이었다.

당시 프랑스 북부 전선은 참호전이 가장 치열한 곳이었다. 전쟁 발발 후 독일과 오스트리아 주축의 동맹국과 프랑스와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국 병사들은 무려 760km나 이어진 각자의 참호 속에서 대치하면서 무려 1460일을 싸웠다.

그 참호 속은 자주 내린 비 때문에 늘 물로 차 있었고, 병사들의 배설물이 역류해 넘쳐흘렀다. 그렇다고 참호를 벗어나면 바로 적의 총탄에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어 시체와 배설물로 악취가 진동하는 참호 속에서 병사들은 발이 썩어가는 등 그야말로 생지옥 같은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중대별로 돌아가면서 한 달에 6일 정도만 참호전에 임하면 됐던 것. 허나 이곳 전선에서는 한 달 전부터 독일군의 총공격이 있을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고, 하필 소년이 지원한 부대는 막 참호에 투입되고 있었다. 한 겨울의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그곳으로 가는 길은 전사자들의 무덤에 꽂힐 하얀 십자가들이 배달되고 있었고, 시체 썩는 냄새도 점점 진동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소년이 그 부대에 지원했던 건 중대장이 잘 아는 형이었기 때문. 스탠호프(샘 클라플린) 대위는 한때 고향 집 관리인이었고, 당시 소년은 친형처럼 그 형을 따랐었다. 그 형과 함께라면 어떤 전투도 이겨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 그랬다. 소년은 세상 물정 모르는 순수한 영혼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부대에 도착하자 스탠호프 대위의 부관인 오스본(폴 베타니) 중위는 스탠호프 대위와의 친분을 자랑하듯이 말하는 소년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그때와 비교하면 많이 다를 거야. 이 중대를 이끌면서 온갖 지옥을 헤쳐나왔지. 중압감이 사람을 바꾸는 거야.” 실제로 그랬다. 아주 오랜만에 만난 소년을 향해 형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일관했고, 왜 하필 우리 부대를 지원했냐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정작 소년을 가장 당황하게 만들었던 건,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나라를 구하려는 전쟁터에서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들은 하나같이 한 끼 식사 메뉴에 집착을 했고, 늘 불안하고 우울해 보이는 모습은 군사학교에서 배웠던 군인의 용맹과는 관계가 없었다. 그리고 그 풍경에 막 적응할 때쯤 소년은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상부에서 명령이 하나 떨어졌는데 독일군의 총공격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장교 2명, 병사 10명으로 구성된 분대를 결성, 독일군 참호로 잠입해 포로를 생포해오는 것. 그게 하필 스탠호프가 이끄는 중대로 떨어지고 말았다. 빌어먹을. 재수가 없으려니까. 결국 소년과 오스본 중위가 장교로 차출된다. 드디어 전투에 임하게 된다며 들떠 있는 소년. 허나 오스본 중위는 작전 수행 당일 아침에 수염을 깎다 그만 피를 보게 되고 그 일로 죽음을 예감한다.

연막탄이 가려줬지만 수십 정의 독일군 기관총이 난사되는 그곳에서 들떴던 소년의 표정은 마침내 공포로 뒤덮이고 만다. 아마도 그 순간 소년은 이렇게 생각했으리라. ‘아. 언제 죽을지 모르니 그렇게 한 끼 식사에 집착했던 거구나.’

마침내 시작된 독일군의 총공격. 소년이 이곳으로 온지 나흘 째 되는 날이었다. 참호로 쏟아지는 적의 포탄으로 인해 소년은 크게 다치게 되고, 전우의 부축을 받아 참호 속 침대에 눕게 된다. 그리고 그의 곁엔 스탠호프 대위, 아니 형이 있었다. 그의 눈빛은 그제야 오래 전 같이 놀아줬던 형의 그것이었다. 적의 포탄으로 흔들리는 지축 속에서 침대에 누운 소년의 눈빛은 앳되기만 했고, 그 눈빛은 소년이 왜 이곳에 오게 됐는지를 자꾸만 묻는다. 소년은 그렇게 잠들었다. 순수는 그렇게 짓밟혔다. 세상이 짓밟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2018년 11월 28일 개봉. 러닝타임 107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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