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세렌디피티’-우연, 필연, 운명
영화 ‘세렌디피티’-우연, 필연, 운명
  • 이상길
  • 승인 2021.12.09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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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렌디피티>에서 조나단(존 쿠삭)과 세라(케이트 베킨세일)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백화점에서 서로의 애인에게 줄 선물을 고르다 하필 같은 물건(장갑)을 동시에 잡게 된다. 그 인연으로 둘은 카페에 앉아 파르페(아이스크림의 일종)를 같이 먹게 되고 이런 맛집을 어떻게 알게 됐냐는 조나단의 물음에 세라는 이렇게 말한다. “이름 때문에요. ‘세렌디피티(Serendipity)’. 발음도 예쁘고 ‘우연한 행운’이란 뜻이 좋아서요. 사실 우연보다는 운명을 믿지만요.” 그러자 조나단은 “운명이 결정한다? 그럼 우리 의지는 소용없고요?”라고 묻게 되고, 그의 말에 세라는 다시 이렇게 대답한다. “결정하는 건 우리지만 운명이 보내는 계시를 잘 읽어야 행복을 찾죠.”

이후 밖으로 나간 둘, 조나단은 세라에게 이름과 연락처를 묻지만 각자 애인이 있는 만큼 세라는 거절한다. 그렇게 둘의 만남은 그걸로 끝인가 싶었는데 세라와 헤어진 뒤 조나단은 목도리를 백화점에 놓고 왔다는 걸 깨닫고는 급하게 찾으러 가게 되고, 거기서 세라를 다시 만나게 된다. 세라 역시 물건을 놓고 갔던 것. 이쯤 되면 운명의 계시가 조금은 있다고 생각한 둘은 아쉬움에 스케이트를 같이 타러 가게 되고, 헤어지면서 이름과 연락처를 적어달라는 조나단의 요청에 가진 지폐에 연락처를 적어달란 뒤 그걸 캔디를 사면서 매점 주인에게 줘버린다. 그리고 자신의 연락처는 자신이 가진 책에 적어 다음 날 헌책방에 팔겠다고 말한 뒤 그 책을 발견하게 되면 연락하라고 말한다. 자신도 그 지폐를 찾게 되면 연락하겠다면서. 만날 운명이면 만나게 된다며. 과연 둘은 다시 만나게 될까?

사랑에 빠지면 우연이나 필연, 혹은 운명 같은 거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다른 것도 아닌 무려 사랑이니까. 누구든 자신이 하는 사랑만큼은 특별하길 바라고, 해서 우연에 끌려 사랑을 시작한 뒤 필연을 거쳐 결국은 운명적인 사랑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또 신을 믿지 않아도 사랑을 할 때만큼은 하늘의 계시 같은 걸 받길 바란다. 너무 좋아서 너무 아픈 게 사랑이니까.

그렇다 해도 세라는 좀 심하다고요? 허나 약혼자와 결혼식을 앞두고 세라를 못 잊어 그녀를 찾아 나선 조나단에게 그의 친구 딘(제레미 피번)은 이런 말을 한다. 딘은 최근 여자친구와 헤어졌고, 왜 헤어졌냐는 조나단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그냥 식은 거야. 사랑이 죽은 거지.” 그리고 사망원인을 묻는 조나단에게 이렇게 설명한다. “우린 너처럼 운명적인 게 없었거든”

우연이 반복되면 운명이 된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필연은 우연과 운명을 연결하는 노력 같은 것. 실제로 조나단도, 세라도 운명에 끌리듯 각자의 약혼자를 뒤로 한 채 서로 찾아나서는 노력을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각자의 약혼자들과는 자꾸 엇갈리는 대신 짧은 만남이었지만 조나단은 세라와, 세라는 조나단과 관련된 것들이 우연한 행운처럼 계속 발생했다. 가령 조나단의 경우 이곳저곳에서 ‘세라’라는 이름이 자꾸 들렸고, 세라 역시 비슷한 현상을 겪었다.

영화니까 그렇다고요? 그렇지 않거든요. 현실에서도 누구든 마법 같은 우연이 자꾸 겹치는 사람을 일생에 한 명은 꼭 만나게 된다. 나만 해도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다. 첫 만남부터 그런 우연이 계속됐는데 다 차치하고 이 영화 <세렌디피티>와 관련된 우연만 잠시 소개하련다. 현실에서도 사랑은 가끔 마법 같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오래 전 습작 소설을 한 편 쓴 적이 있었다. <번지점프>라는 제목의 중편소설인데 신부복을 벗고 다시 일반인으로 돌아가려는 카톨릭 신부와 어린 여대생의 운명적인 사랑이야기였다. 카페에서 ‘어떤 남자가 좋냐’는 신부의 질문에 그 여대생이 어떤 대답을 하면 좋을까 한참 고민을 했었다. 또래 남자는 다 시시하다는 조금 독특한 캐릭터여서 나름 특별한 대답을 고민했고, 해서 심지어 내가 여자라면 과연 어떤 남자를 좋아할 까라는 생각까지 해보게 됐다. 그렇게 해서 찾은 대답은 이거였다. “전 제가 존경할 수 있는 남자가 좋아요.”

사실상 첫 만남이었는데 그 사람도 내가 던진 질문에 똑같은 대답을 했었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소설 속 여대생의 이름도 ‘세라’였고, 개인적으로 영화, 드라마, 소설 통틀어 가장 애틋한 여성 캐릭터다. 내가 창조했으니까.

근데 이게 다가 아니다. 직장생활을 힘들어하는 거 같아 한번은 노예 출신의 스토아학파 철학자인 에픽테토스의 철학을 담은 유튜브 영상을 보내준 적이 있었다. 요는 우리를 화나게 하는 건,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화를 내기로 결정한 나도 공범이라는 것. 그러니까 화나는 일에 휩쓸리지 않는 쪽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거다. 그런데 <세렌디피티>에서 운명적인 사랑을 찾아 나선 친구 조나단에게 딘도 에픽테토스의 명언을 언급하며 그를 응원하더라. 그 명언은 이랬다. “발전하려면 우둔할 정도로 매달려라.” 케이트 베킨세일도 나오고, 크리스마스 시즌에 쓰면 좋을 듯해서 20년만에 다시 보게 됐는데 이 장면에서 깜짝 놀랐다. 수많은 철학자 가운데 왜 하필 에픽테토스냐구! 어때요? 이 정도면 거의 마법 수준 아닌가요? 웃기지도 않다고요? 칫. 그건 그렇고 영화에서처럼 그 사람이랑은 잘 됐냐고요? 메리 크리스마스!

2002년 4월 19일 개봉. 러닝타임 91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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