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과 먹이, 그리고 욕심
밥과 먹이, 그리고 욕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1.11.29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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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은 밥이나 먹이로 산다. 먹기 위해 살고, 살기 위해 먹이를 찾는다. 그러나 욕심은 없다. 소승불교에서 깨달은 사람을 ‘나한(羅漢)’ 혹은 ‘성(聖)’으로 부르고, 나한을 의미상으론 ‘응공(應供)’이라 부른다. 응공은 공양받을 사람 즉 밥을 먹을만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밥은 먹고 다니나?’ ‘입에 풀칠하려고’, ‘배고픈 이 밥을 주어 아사공덕(餓死功德=굶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일)하였는가?’, ‘금강산도 식후경’, ‘밥 먹고 합시다’, 헌식(獻食), 시식(施食), 한식(寒食), 응공(應供), 공양청(供養請),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라(一日不作 一日不食)’는 말의 중심은 모두 ‘밥’이다.

조신(調信)의 큰딸은 열다섯 살에 굶어 죽었다. 또, 열 살짜리 딸아이는 밥을 빌리러 마을을 돌아다니다 개한테 물려 고통을 호소했다. ≪재조집(才調集)≫의 <강남한(江南旱)>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올해도 강남에 가뭄이 들어서 구주(衢州)에서는 사람까지 먹는다는데(是歲江南旱 衢州人食人).”

〈심청전〉에는 불전에 올리는 공양미(供養米) 삼백 석이 등장한다. 〈흥부전〉에서 흥부는 식구를 먹여 살리려고 매품을 팔러 병영으로 간다. 이산 혜연선사는 발원문에서 “흉년 드는 세상에는 도량(稻粱=벼와 기장)이 되어 구제하기를” 원했다. 죽은 이의 입속에 쌀돈··구슬·조가비를 물리는 것은 먼 길의 배고픔에 대비하는 반함(飯含) 의식이다.

〈흥부전〉에서 박흥부는 문전걸식(門前乞食=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얻어먹음)을 했다. 그 후 박통 속에서 쏟아진 쌀의 양이 일천오백삼 석이라고 했고, 기민(饑民=굶주린 백성)을 구제한다는 원도 세운다. 민속의 고시레(고수레)·‘훗세’·물밥과 유교의 진지·메·헌식 그리고 불교의 마지·잿밥은 모두 ‘밥’을 가리킨다.

‘나이 칠십에 능참봉’이란 속담은 허울만 그럴싸할 뿐 수고롭기만 하고 실속이 없는 경우를 빗대어서 하는 말이다. 칠십 중반에 하루 벌이를 하겠다고 인력 모집 사무실을 기웃거리는 노동자가 바라는 것은 오직 밥일 것이다. 멧돼지가 산속에서 먹이를 구하지 못해 도시에 출몰하듯 필자가 전문성을 내세우며 사회에 참여하는 것 역시 밥 때문이다.

몽골초원의 검독수리가 여우·산양에 늑대까지 공격하는 것. 울산 입암들에서 겨울을 나는 독수리들이 돼지내장을 아귀다툼하듯 먹는 것. 한밤중에 수리부엉이가 떼까마귀를 사냥하는 것. 한낮에 삵이 두루미나 고니를 공격하는 것. 울산을 찾은 떼까마귀 무리가 잠자리를 떠나 농경지로 향하는 것. 여름 철새 백로가 물가를 찾는 것. 새가 아침에 울고 수달이 밤에도 물고기를 사냥하는 것. 악어가 강을 건너는 얼룩말을 잡아먹는 것. 너구리가 태화강 국가정원을 돌아다니는 것. 큰부리까마귀가 주택가에서 음식쓰레기를 뒤적이고 사체를 넘보는 것. 어치나 다람쥐가 도토리를 먹는 것 모두 먹이 때문에 하는 짓들이다.

사람이 바라는 것은 밥이고 짐승이 노리는 것은 먹이다. 삶과 생명을 끊임없이 유지하기 위한 생존 방식이다. 사람은 ‘안정적인 밥’을 위해 직장을 선택하려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해서 참 딱하다. 건강한 사회는 젊은이가 밥벌이에 나서야 하는 세상이지만, 코로나 시대에 20·30 젊은 세대는 밥벌이도 못 해서 고달프기 짝이 없다. 문제는 밥이기 때문이다.

간혹 고위공직 퇴직자의 재취업 보도를 접할 때가 있다. 물론 인과관계나 보은성 덕분이겠지만, 이런 소식은 밥이 중심이 아니어서 씁쓸한 미소만 남길 뿐이다. 그런 미소는 분명하게 기억할 것이다. 송덕(頌德)의 대상이기를 바라며 세운 노방비(路旁碑)가 때론 한낱 돌덩이에 지나지 않는 지탄(指彈·손가락질)의 대상이라는 것을….

김성수 울산학춤보존회 고문·철새홍보관 관장·조류생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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