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국제적 감정
다문화, 국제적 감정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1.11.2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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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는 최고 학교를 졸업하셨다. 한국 전쟁 직후 어려웠던 시절 부산에서 자라면서 유치원을 다니셨다고 한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교육열이 남달랐던 것 같다. 여고 시절 교장 선생님은 시인 청마 유치환 선생님이셨다. 뛰어난 학업 성취와 여고 은사로 모신 청마 선생님과의 인연은 두고두고 자랑거리이다. 언변이 명쾌하고 문학에 조예가 깊어 논리만큼은 어머니를 이길 수가 없다.

그런 어머니에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부분이 있다. 지역감정이다. “우리 집에 외국인 사위는 들어와도 OO도 사위는 절대 안 된다.”

어릴 때부터 들어왔던 말이다. 나는 맞는 말이라고 믿었다.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고 매사에 합리적인 우리 엄마가 하는 말이기에 당연히 옳은 말이어야 했다. OO도 사람들을 내 마음에서 X표를 치고 내몰았다.

내가 졸업한 대학은 국립대학이라 등록금이 비교적 저렴하고 장학금 혜택이 많았다. 멀리에서 와서 우리 학교에 다니는 가난한 수재도 많았다. OO도 출신들도 제법 있었다. 덕분에 그들을 친구로 만났다. 내 삶을 둘러싼 벽에 문을 내어 그들을 초대했다. 문을 열고 나가 그들의 삶을 함께 누리기도 했다. 결혼으로 이어지진 못했지만, OO도 출신 남자 친구를 사귀기도 하고 다양한 차이를 누렸다.

이런 모습을 보고 엄마는 다시 당부하셨다. “우리 집에 외국인 사위는 들어와도 OO도 사위는 절대 안 된다.”

코웃음이 나왔다. 어머니는 그들을 만나려고도, 겪으려고도 하지 않으셨다. 이웃인 그들을 외면하고 사셨다. 아는 자에게 모르는 사람이 주장하는 가짜 진리(?)만큼 우스운 게 또 있을까. 그러나 그 가짜 진리는 때로 진짜 같은 신념을 만들어 낸다. 억지 논리로 무장된 진짜 신념은 꽤나 폭력적이어서 상대가 입을 다물고 대화를 체념하게 한다.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 긍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다. 지역감정도 스케일이 커져서 국제적 감정으로 바뀌어 인종, 종교, 문화에 대한 편견으로 확대되었으니 하는 말이다.

지역감정을 비웃던 우리 세대조차 이런 국제적 편견에서는 자유롭지 못한 듯하다. 혈통, 핏줄을 강조하는 ‘혼혈’이라는 말이 다양한 문화 배경을 의미하는 ‘다문화’라는 말로 바뀌었지만 ‘다문화’라는 말로 우리와 그들을 나누고, 그들은 ‘우리가 아니다’, ‘우리가 될 수 없다’라고 선을 긋는다.

이주민을 자신의 세상에 초대해 보았는가? 이주민 문화를 내 것으로 겪어보았는가? 그렇지 않다면, 내 어머니의 당부 ‘우리 집에 외국인 사위는 들어와도 OO도 사위는 절대 안 된다.’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다. 이미 이웃과 우리 집에 이주민 배우자, 이주민 엄마, 이주민 사위, 이주민 며느리가 들어와 있으니 말이다. 내 이웃, 내 가족으로 살고 있는 이들을 언제까지 거짓 미소로 대할 수 있을까. 거짓은 쉽게 들통난다. 늘어나는 국제결혼 이혼율의 이유를 고민해 봐야 할 때이다.

고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과 국어 선생님은 인권과 지역감정에 대해서 언급하며 개인의 차이가 모여서 오히려 우리 공동체를 풍성하게 한다고 가르쳐주셨다. 그때는 남 일처럼 무심히 들었던 것 같다. 그래도 수업 시간 틈새 강의가 기억에 남아 ‘우리 쌤이 그랬는데…’ 라는 생각으로 쉽게 편견을 깰 수 있었던 것 같다. 고정되지 않은 빈 마음도 한몫했다.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과 문화로 채울 수 있었다. 그들을 진정한 마음의 벗으로 삼을 수 있었다.

나는 여기에서 학교 다문화 교육의 이유를 찾고 싶다. 내 은사는 수업 시간 스토리텔러가 되어 이야기로 교육하셨다. 요즘 교사는 내 은사 세대와는 다르다. 다문화 교육을 다문화 교육인지 알아차리지도 못하게 교육과정에 녹여낸다.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학생들 마음에는 편견, 차별에 대항하는 씨앗을 뿌린다.

학생들은 편견 없는 탄력적인 마음을 가진 시기이기에 선생님과 함께 하는 문화 다양성 활동, 다문화 교육을 통해 씨앗에 싹을 틔운다. 연간 2시간 이상의 다문화 교육이 의무화된 이후 학생들의 다문화 수용성이 조금씩 높아지는 것도 증거이다.

‘곁을 주다’라는 말이 있다. 속마음을 튼다는 뜻이다. 겪지 않고, 함께 하지 않고 속마음을 틀 수 있을까?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건 이주민에게 ‘곁을 주는 일’이다. ‘지역감정’이 과거의 언어가 된 것처럼 ‘다문화’ 또한 죽어버린 어휘가 되길 바랄 뿐이다. ‘다문화’ 교육을 통해 ‘다문화’를 없애야 하는 이 역설이 때로는 난감하다.

이인경 울산중앙중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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