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시공넘어 깨어난 고대 투르판‘망자의 땅’
천년의 시공넘어 깨어난 고대 투르판‘망자의 땅’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9.05.28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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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왕족·백성 무덤 400개 발굴 정보량 많아 ‘지하 박물관’
고창국 대장군 묘 벽화에 담아 ‘청렴·경세제민’ 유가 철학 묘사

사고(四苦)의 하나인 사고(死苦)는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인간사 마지막 대사(大事)이다. 후손들은 지극 정성으로 대규모의 호화분묘를 만들어 망자(亡者)가 죽어서도 생전의 호사를 누리도록 배려해준다. 때로는 이런 상사(喪事)를 통해 자신의 위를 공고히 하기도 한다.

이유야 어떻든 이런 호화분묘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수천 년 전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중요 단서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그렇고 캄보디아의 앙코르 유적이 그러하며 고구려의 벽화 묘들과 신라의 왕릉들이 또한 그렇다.

척박한 곳에서 문명의 꽃을 피워낸 고대투루판지역민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 또한 당시 인류의 보편적인 개념에 입각해서 그들 자신들의 무덤을 만들었다. 고창고성의 북쪽에 위치한 아스타나 고분군(古墳群)이 바로 그것이다.

이 고분군은 기원 후 3세기에서 8세기 사이의 고창고성 일대에 살았던 지배층을 비롯한 거주민들의 공동묘지이다. 영국의 M.A.스타인 탐험대가 1914년 처음으로 발굴조사 하였는데 현재까지 확인된 가장 오래된 묘는 서기273년의 묘이고 가장 최근의 것은 서기 772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10㎢의 넓이에 왕족은 물론 일반 백성들까지 잠들어 있는 이 고분군은 1959년부터 400개의 무덤이 발굴 조사 되었다. 이 발굴 조사를 통해 방직품(紡織品), 조소(彫塑), 벽화, 수공예품, 페르시아 화폐 그리고 진귀한 서류 등을 비롯한 수많은 문헌이 출토되었다. 고이 잠든 고인들을 다시 깨우고 성가시게 굴면서 그들이 영원히 가지려했던 수많은 유물들이 다시 세상으로 나온 것이다.

그 덕분에 국제‘투루판’학회의 정보창고 역할을 도맡고 있어 지하 박물관이라 불린다.

한자로는 아사탑나(阿斯塔那)라고 쓰는 아스타나는 위그루어로 ‘휴식’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따라서 아스타나고분이란 영원한 휴식을 하는 망자의 땅이라는 의미가 된다. 황량한 타클라마칸 사막의 한편에 위치한 이 망자들의 휴식처는 주변을 담장으로 막아 놓았다. 경주 대능원 주변의 담장을 떠올리게 하는 시설물이다.

사막의 거센 바람과 도굴꾼으로 부터 보호는 되겠지만 훨훨 날아야할 영혼들을 우리 속에 가둬 둔 것 같아 왠지 답답한 느낌이 든다.

관리동을 겸한 입구 건물을 들어서면 잘 꾸며 놓은 정원이 있고 맞은편에는 뱀의 몸통을 서로 꼬아 비튼 채 서있는 여와와 복희씨의 상을 탑처럼 세워 두었고 그 주변에는 12지신상을 만들어 세워 두었다.

여와와 복희는 이곳 무덤에서 다수 발견된 것인데 그 중 벽화 두 점이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가운데 한 점은 서관 3층의 중앙 아시아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여와와 복희는 각기 컴퍼스와 자를 들고 있는 형상인데 우주 삼라만상의 질서를 관장하는 의미라고 한다.

이 정원과 고분군을 구분해둔 내부 담장에 난 작은 출입문을 지나면 비로소 천여 년 세월 저 너머의 고창국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600여개라는 많은 무덤은 그 중 몇 곳을 개방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세 곳을 살펴본다.

72TAM216호 묘

고창국의 좌위대장군 장웅(張雄)의 묘라고 하는데 공식 안내판에는 그런 설명이 없고 무덤번호만 기록되어 있다. 부부합장(合葬) 무덤으로 서기 8세기경의 것으로 추정하는데 길이 31.26m, 깊이 5.28m의 규모다. 구조를 살펴보면 10여m 정도의 계단을 내려가면 묘문(墓門)이 나오고 천(天)이라는 평평한 곳이 나온다. 아마도 전실(前室)의 개념인 것 같다. 이곳을 조금 지나면 좌우로 작은 동굴처럼 생긴 이실(耳室)이 나오고 조금 더 들어가면 묘실(墓室)이 나온다. 입구 맞은편에는 낮은 단(壇)이 있고 그 뒷벽에는 6폭의 병풍 형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맨 왼쪽에는 걸이에 걸려있는 서양종을 거꾸로 매단 듯 한 형태의 도자기가 그려져 있고 다음으로는 옥인(玉人), 금인(金人), 석인(石人), 무자인(撫字人) 이란 한자가 쓰인 옷을 입은 사람들, 그리고 항아리와 타래실이 차례로 그려져 있다.

이 벽화의 내용은 중국의 유가(儒家)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열경감계(列經誡鑒)의 고사(故事)인데 이에 대한 해석을 왼쪽부터 차례로 달아보면 다음과 같다.

기울어진 도자기는 내부에 많은 양의 술을 부으면 기울어져 엎질러지고 적당한 양을 부으면 균형을 잡고 바로 서있게 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 중용(中庸)의 도를 의미한다.

옥인(玉人)은 물질에 대한 욕망을 자제하고 수양에 힘쓰며 덕(德)을 쌓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인(金人)은 그림을 살펴보면 수건으로 입을 3겹으로 가리고 있다. 삼함기구(三緘其口)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인데 글자 그대로 하자면 입을 세 번 봉한다는 말이 된다. 즉 입을 함부로 열어 말을 많이 하지 말고 항상 겸손하고 몸가짐을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다.

반면에 입과 팔을 벌리고 있는 석인(石人)은 남을 위해 봉사하고 사회정의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뜻이다.

무자인(撫字人)은 세상만사(世上萬事)를 있는 그대로 관(觀)하고 고고(孤高)하게 살라는 의미이다.

항아리, 청초(靑草) 묶음 그리고 비단실타래는 시경·소아·자구(詩經·小雅·自駒)편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린 것로 한 무제 때 공손홍이라는 사람이 승상(丞相)이 되어 벼슬길로 나갈 때 그의 친구 추장청이 보낸 선물이다.

이 세 가지가 갖는 역할에서 깨달음을 얻으라고 보내었던 것이다. 먼저 푸른 풀 다발은 훌륭한 주인을 만나면 자신을 어떻게 대접해 주는가에 관계없이 충성을 다하는 명마(名馬)에게서 교훈을 얻으라는 뜻이다. 비단실은 비록 매우 가늘기는 하지만 적당한 양으로 짜기만 하면 탁월한 효능을 보이는 것이다.

항아리는 넣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가득차서 깨기 전에는 꺼낼 수 없는 구조인데 관리란 마땅히 청렴해야하고 백성들에게 높은 세금을 매겨서 부당한 축재(蓄財)를 하여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런 벽화내용은 무덤 주인의 생시 생활 철학을 반영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 된다.

또 이 무덤에서는 당천보원년(唐天寶元年 : 742년) 잔변사(殘辯辭)와 당현종모년잔적장(唐玄宗某年殘籍帳)과 같은 문헌도 나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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