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왜성을 바라보는 눈 (下)
울산왜성을 바라보는 눈 (下)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1.11.14 22: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거짓말같이 ‘구름 한 점 없는’ 주말(11월 13일), 한때 ‘도산성(島山城)’으로 불렸던 울산왜성을 오랜만에 찾았다. 거의 1년 만이었을까. 찾는 이들의 발길은 뜸했고 ‘위드 코로나’에 힘입은 빤짝 ‘버스킹 공연’은 바람 빠진 잔치 풍선을 닮아 있었다.

그런데도 바로 그 옆, 말에 올라탄 갑옷 차림의 두 장수는 그저 묵묵부답일 뿐이었다. 빛바랜 구릿빛의 도원수 권율(權慄)과 경리 양호(楊鎬)의 초라하기 짝이 없는 동상. 이래 봬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도산성 전투’(1597.12.2

3.~1598.1.4.)에서 ‘독 안에 든 쥐’(倭軍)를 잡겠다고 조명(朝明) 연합군 3~4만을 불같이 호령하던 조·명 두 나라 연합군의 합동 사령관들 아니던가.

사진 몇 장을 찍어 보냈더니 금세 답글이 왔다. 지인의 말 속에는 가시가 있었다. “조잡해서 보기가 민망합니다.” ‘작품성’은 논할 가치도 없다는 말이 뒤따랐다. 단 하나, 동상 언저리 돌판에 새겨진 날짜별 전장 상황만은 일목요연해서 좋았다.

“※ 명나라 군대가 울산에 도착하여 울산왜성 앞 왜군 병영을 불태웠으며, 권율 장군도 조선군을 거느리고 참가하였다. 왜군은 장수 6명을 포함하여 500여명이 전사하였다. 가토 기요마사가 서생포왜성에서 울산왜성으로 급히 들어왔다.” “※ 1597.12.30.= 왜군은 갈증에 시달린 나머지 말의 피나 자신의 소변을 받아마시기도 하였다. 군량이 바닥나자 종이와 벽의 흙도 끓여 먹었다.”

동상이 세워지기 전후 사정을 꿰뚫고 있는 필자이지만 아직도 풀지 못한 궁금증이 몇 가지 있다. 조명 두 사령관의 동상과 같이 세우기로 했던 왜장(倭將) ‘가토 기요마사(加藤?正)’ 동상의 묘연한 행방이 그중 하나다. 그의 동상은 반론을 담은 지역 언론사의 기사나 칼럼을 의식한 탓인지 지금껏 한 번도 햇빛을 본 적이 없다.

현재 세워져 있는 두 인물 동상의 시선이 왜군이 죽기 살기로 지키려 했던 도산성이 아니라 조명 연합군 사령부의 진지가 있었던 학성산(鶴城山)을 향하고 있는데도 여태 바로잡을 생각은 왜 안 하는지? 이것이 또 하나의 궁금증이다. ‘설계변경’ 전만 해도 밑그림 속의 왜장은 학성산 쪽을, 조명 사령관들은 도산성 쪽을 향하고 있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쩌면 가토 기요마사의 말 탄 동상이 대명천지에 공개되기를 바라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학성산~도산성 사이에 ‘국립울산박물관’을 짓고 ‘덕수궁 정문의 수문장(守門將) 교대식’을 본떠 ‘조·명·일(朝明日) 3국 의장대’가 퍼레이드를 펼치게 하면 관광객이 제 발로 찾아올 것이라고 믿는 분도 있어서 하는 얘기다.

물론 학술적 제안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제안 속에 ‘일본·중국 관광객 유치’라는 상업성(장삿속)이 더 짙다면 상황판단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침략군 수괴의 동상을 우리 울산에 세우겠다고?” “지구촌 어디에 그런 민족이 있다던가?” 중구청이 가토 기요마사의 동상을 세우기 직전에 터져 나온 반대 목소리의 한 갈래였다. 이 논리는 앞으로도 유효할지 모른다.

내친김에 가파른 계단도 마다하지 않고 울산왜성(학성공원)의 ‘1층’에 올랐다.(1층은 주민들이 부르는 ‘삼지환’의 다른 이름.) ‘三之丸’(산노마루)의 표지석 <三丸趾>은 옛 그대로였다. 끄트머리 한자가 ‘터’를 뜻하는 우리 식 ‘址’가 아닌 ‘趾’인 게 신기했다. 일본어에도 능통한 지인에게 다시 물었다. 속 시원한 답이 돌아왔다. “우리는 ‘址’자를 쓰지만, 일본사람들은 ‘趾’자를 쓰더군요.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입니다.” 2층과 3층, 즉 ‘二之丸(니노마루)’과 ‘本丸(혼마루)’은 다음 기회에 찾기로 했다.

김정주 논설실장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