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노든’-권력이 진실은 아니다. 진실이 권력이지.
영화 ‘스노든’-권력이 진실은 아니다. 진실이 권력이지.
  • 이상길
  • 승인 2021.10.14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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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노든’ 한 장면.
영화 ‘스노든’ 한 장면.

권력을 진실로 여기는 습관은 어릴 적부터 길러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힘 있는 존재가 하는 이야기는 이상하게 귀 기울여 지고 믿음이 더 가기 마련인데 그건 보통 어릴 적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뜻. 갓 태어난 아이가 어느 정도 인식이 생기게 되면 생존을 위해 부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아이에게 부모는 창조주이자 힘 있는 보호막이니 그가 하는 이야기도 철석같이 진실이라 믿는다. 그럴 수밖에 없잖아?

그런데 이 부모라는 사람들이 아이에게 무조건 진실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아니 그럴 수가 없다. “내가 어떻게 태어낫냐”는 아이의 질문에 정자와 난자가 결합해 잉태됐다고 할 건가? 우스갯소리로 보통은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하는데 틀린 말은 분명 아니지만 아이는 그 소리에 이내 울음을 터뜨린다. 진짜 하천이나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밑에서 주워온 줄 알고.

하지만 이건 나중에 “(엄마) 다리 밑에서 주워온 것 맞잖아”라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지, 산타클로스 이야기는 꽤 심각하다. 남들 다 그런다고 있지도 않는 산타클로스가 크리스마스이브만 되면 루돌프가 끄는 썰매를 타고 찾아온다고 거짓말을 하면 아이는 신(神)과 같은 부모가 하는 말이니 철석같이 믿는다. 물론 아이가 커서는 본인도 거짓말을 가끔 하게 되니 그때는 진실을 알고 난 후에도 별 감흥이 없지만 어릴 때는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부모의 이야기가 거짓인 줄 알게 되면 얼마나 충격이겠는가. <응답하라1988>에서 다섯 살의 진주(김설)도 “산타클로스는 없다”는 대학생 보라(류혜영)의 말에 엄청 울어재낀다. 참, 거짓말 말고도 진실 앞에 부모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하나 더 있다. 바로 “넌 몰라도 돼!”라고 윽박지르면 그만이다. 그 말에 힘없는 아이는 이내 진실에 대한 탐구를 멈춰버리곤 한다.

한편 이 같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정부(국가)와 국민의 관계에도 그대로 투영된다. 외세의 침략이나 타인의 범죄행위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는 정부이기에 그가 하는 이야기는 모조리 진실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니까 권력을 쉽게 진실로 받아들인다.

영화 <스노든>에서 주인공 에드워드 스노든(조셉 고든 레빗)도 처음엔 그랬다. 2001년 9.11테러 이후 당시 부시 행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을 내걸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고, 미 의회는 테러방지법을 통과시키게 된다. 애국자법이라 불리는 이 법안은 9.11테러 이후 테러를 방지한다는데 목적을 뒀지만 전화나 이메일에 대한 광범위한 감청을 허용하며 테러리스트로 의심되는 사람을 체포해 무기한으로 영장 없이 구금할 수 있도록 했다. 당시 미국 이동통신사인 AT&T는 매일 약 3억2천만 건에 달하는 정보를 NSA(미 국가안보국)에 제공했다고 한다. 결국 미국 정부는 NSA를 통해 자국민을 넘어 사실상 전세계인을 감시하고 있었던 셈. 이거 영화 속 이야기냐고요? 맞아요. 허나 실화이기도 해요. 그렇다. 주인공 스노든도 실존인물인데 IT천재였던 그는 테러를 막기 위해서는 정부의 그 같은 조치가 처음엔 당연한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NSA에 들어갔더니 저런 짓을 벌이고 있었던 거다. 좀 더 현실감이 들도록 설명을 보태자면 NSA가 개발한 ‘프리즘’이라는 프로그램은 마이크로소프트를 비롯해 구글, 패이스북, 유튜브 등의 서버에 직접 접속해 개인 이메일이나 전화감청은 물론 개인 노트북 캠에 침투해 은밀한 사생활까지도 엿볼 수가 있었다. 전 세계 어디든. 그리고 그런 짓은 오바마 행정부에서도 계속됐다.

물론 자국의 정보력인 만큼 계속 월급 받아가면서 참을 수도 있었을 테다. 하지만 영국 ‘가디언’ 등 언론에 이 같은 실상을 낱낱이 폭로한 뒤 러시아로 망명한 스노든은 시간이 조금 지난 뒤 자국의 한 토크쇼에 비대면으로 출연해 폭로가 가치 있는 일이었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물론”이라며 이렇게 대답한다. “국민은 정부에게 질문할 수 있어야 하고, 그걸 포기하면 안 돼요. 그 원칙을 기반으로 미국이 세워진 겁니다. 우리가 국가의 안보를 지켜내고 싶다면 먼저 그 원칙을 지켜내야 합니다. 정부가 우리에게 겁을 주면서 우리의 기본권을 희생하도록 만든다면 우리는 굴복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튼 스노든의 폭로로 미국 의회는 2015년 테러방지법을 폐지한 뒤 NSA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에 나서게 된다. 결국 진실이 권력이 된 셈이다.

앞서 부모와 정부를 비슷한 포지션에 놓았지만 사실 큰 차이점이 하나 있다. 부모는 거의 예외 없이 자식을 사랑하지만 정부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 아니 역사적으로 봐도 그렇지 않은 정부가 더 많았다. 때문에 부모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자식에게 거짓말을 할 때가 있는데 하물며 정부야. 무엇보다 세상 모든 정부는 ‘권력유지’라는 악마의 마음을 품고 있다. 때문에 권력이 진실은 아니다. 진실이 권력이지. 또 진실은 언제나 찾으려고 하는 자의 것이고. 그나저나 내 나이 곧 반백살. 철석같이 믿었건만 있는 줄 알았던 산타클로스가 없었을 땐 쪽팔리게 어린 진주처럼 울 수도 없고, 이젠 우짜지? 2017년 2월 9일 개봉. 러닝타임 134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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