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에게 격려를
용기에게 격려를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1.10.13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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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는 낯선 모습으로 다가온다. 한 번도 익숙한 모습을 내밀지 않는다. 매번 용기를 내야 할 시점에 몸과 마음이 얼어붙는다.

그날도 어김없이 새벽 어스름을 뚫고 산책에 나섰다. 가로등 불빛을 따라 걷다 어느새 공원에 도착했다. 여전히 사위는 어두웠다. 물체의 움직임은 간파할 수 있어도 형체를 또렷하게 분간할 수는 없었다. 풀과 풀 사이의 자갈길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즈음, 멀리 있던 물체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산책 나온 사람처럼 보였지만,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는 순간은 늘 긴장감이 돈다.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어 막연한 불안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흐릿했던 물체는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선명해졌다. 긴장감도 함께 높아졌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사이 두 손을 마주 잡고 걸어오던 노부부는 “안녕하세요”라는 말과 함께 묵례를 건네며 지나갔다. 생각지도 못한 노부부의 인사를 받은 나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찰나에 오만 상상을 다 했기 때문이다.

상상의 나래라는 것이 온통 불순물 덩어리였다. 나의 모습에서 불신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본 듯했다. “안녕하세요”라는 노부부의 짧은 인사는 모든 어둠이 순식간에 밝음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노부부의 인사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고 마음도 청량해지는 것 같았다. 짧고 간단한 인사가 강렬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오늘 하루는 무엇을 해도 기분 좋은 일이 겹칠 것만 같았다.

아침밥을 먹고 딸내미와 함께 출근길 버스를 탔다. 이따금 이용하는 버스에 이날 따라 승객이 많았다. 딸내미와 앞뒤로 나란히 앉아 한참을 가다 용기의 순간과 맞닥뜨렸다. 노인치고는 젊어 보이고, 중년치고는 늙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탔다. 이리저리 살피던 할머니는 자리가 없어 나와 딸내미가 앉은 자리까지 밀리듯 들어왔다. 밤늦도록 공부한 딸내미를 생각하니 그냥 앉아 쪽잠이라도 자게 놔두고 싶었지만, 할머니를 생각하니 그럴 순 없었다.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새벽 산책길의 노부부한테서 받은 용기에 보답할 차례라고 생각했다. 곤히 잠든 딸내미를 깨워 자리를 양보하게 하고 내 자리에 딸내미를 앉혔다. 자리를 양보받은 할머니는 괜찮다고 손사래 쳤지만, 나의 뜻과 의지를 따라 주었다. 나는 목적지까지 서서 왔지만, 새벽에 받은 용기의 격려에 보답한 것 같아 뿌듯했다. 새벽의 인사와 아침의 자리 양보가 위안과 위로가 되었던 하루였지만, 마스크를 둘러싼 논란을 보면서 용기의 정의를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거리를 활보하거나, 마스크를 써달라는 요청을 거절하면서 시비가 붙었다는 뉴스를 접할 때면, 객기와 용기를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아닌지 싶을 때가 많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보면 ‘객기’는 뜻풀이가 객쩍게 부리는 혈기로, ‘객기를 부리다’처럼 부정의 의미가 강하다. 반면 ‘용기’는 씩씩하고 굳센 기운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지나치게 겁을 내거나 기가 죽을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존재하는 위험을 가볍게 여겨 객기를 부리는 만용은 자신의 건강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안전을 위협하기도 한다.

지금은 객쩍게 부리는 객기가 아니라 슬기롭고 지혜로운 용기를 갖춰야 할 때이다. 백신 접종률이 높아지면서 집단면역이라는 새로운 실험을 목전에 두고 있지만, 여전히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가장 기초적인 방역수칙인 마스크 착용의 생활화는 집단면역에도 당분간 계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스크를 쓰지 않는 객기가 아니라 마스크를 쓰는 용기가 진정한 용기일 것이다.

용기가 더 이상 낯선 모습이 아닌 익숙한 모습이 될 때, 나와 우리 모두의 공동체는 지금보다 조금 더 따뜻하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되어있을 것이다.

김종섭 울산광역시의회 예결특위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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