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상주의 ‘푸른 누리’
경북 상주의 ‘푸른 누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1.10.11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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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걸음이었다. 경북 상주라지만 상주 시내 가기보다 충북 보은이 더 가깝다는 속리산 자락의 ‘푸른 누리’라는 곳. 버스 타는 곳 가까이에 세워진 순우리말 간판에 눈길이 끌렸다.

9월 18일이면 석 주도 더 지났다. 집 나올 때 밤 따러 갔다 오겠노라 했지만 실은 그 산골짜기에 사는 사람들이 어떤 분인지, 바로 만나 보는 것이 더 큰 뜻이었다. 목소리로만 대하던 최한실 선생을 처음 본 것은 이날 점심나절. 미리 들은 대로 그의 손에는 뒷산에서 따왔다는 송이버섯 몇 자루가 들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푸른 누리’ 나들목 언저리에서 동네 청년들이 눈을 부릅뜨고 진을 치고 있던 이유를 이제야 겨우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송이버섯 철인지라 외지인의 섣부른 접근을 한사코 막겠다는 일념에서 비롯된 애향심(?) 비슷한 것이었던 것.

우리 일행은 모두 셋. 서로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했다. ‘최’는 성이지만 ‘한실’은 순우리말 이름. 참, 그렇지. 사연댐 상수도 보호구역에 닿아 있는 마을 이름이 ‘한실’이었지. 한실 선생은 울산 손님들에게 순우리말 이름도 선뜻 지어주었다. 한 분은 ‘선비’, 다른 분은 ‘밝달’이란 이름을 얻었다. 나는 젊어서 쓰던 붓이름(필명) ‘갈매’를 그대로 쓰기로 했다.

꽤 넓은 마당에다 집도 여러 채 옹기종기 모여 있는 ‘푸른 누리’는 도대체 무엇 하는 곳일까? 논밭을 여러 사람이 더불어 일구어 나가는 일터, 달리 말해 ‘협업농장’쯤으로 알고 자잘한 이야기는 다음에 듣기로 했다.

그날 버스가 다니는 마을(상주시 화북면 입석2리) 찻길 언저리 간판에서 찍은 사진에서 새로 알게 된 일이지만, ‘푸른 누리’란 큰 글자 아래에는 ‘(사)마음 닦는 마을-Vipassana Center’와 ‘우리말 새뜸 배달겨레 소리’란 글자가 세로로 나란히 적혀 있었다. Vipassana? 사전을 찾아보니 읽기는 ‘위빠사나’로 읽고 뜻은 ‘깨달음을 얻는 불교 수행법’이라는 풀이말이 나와 있었다. 그리고 ‘새뜸’은 ‘새내기’, ‘동아리’란 말을 만든 백기완 선생이 ‘새로 뜬다’는 뜻으로 지은 말로 ‘신문’을 의미한다는 게 한실 선생의 귀띔이었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 참, 그렇다면 ‘푸른 누리’에서는 ‘논밭 농사’ 말고 ‘사람 농사’도 짓는다는 말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너른 울타리 안에는 ‘마음을 닦는’ 명상의 집이 따로 한 채 있었다. 명상 공부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서른 명 남짓. 같이 쓰는 식당도 물론 빠질 리 없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곳에서 두루 쓰이는 말들. ‘잘 데’(숙소), ‘참집’, ‘여자 나들문’, ‘사내 밥 먹는 데’, ‘여자 씻는 데’, “물병은 마음 닦기 방 밖에 놓아주시기 바랍니다.” ‘문 여닫을 때 소리 덜 나게 살포시∼’ 어느 하나 풋풋하고 정겹지 않은 말이 있던가!

낯선 그 숱한 말들은 우리의 눈길을 꾸준히 사로잡았다. ‘거님길(산책길)’ ‘하루살이 짜임새(일정표)’까지…, 슬쩍 훔쳐본 뒷간 쓸 때 지키는 일(화장실 이용수칙)이 가장 흥미로웠다. “△뒷종이(휴지)는 아껴서 씁니다. △뒷종이는 더러운 데가 안 보이도록 잘 버립니다. △뒷종이는 꼭! 뒷종이통 안에만 버립니다. △달걸이 뒷종이는 꼭! 검은 비닐 안에 모았다 버립니다. △똥동이물(변기물)을 내리고, 깨끗하게 내려갔는지 한 번 더 봅니다.”

달리 놀라운 일도 있었다. 영화 <말모이>에서 보았듯, 한실 선생 나름의 ‘우리말집’(우리말 사전)을 여섯 사내·여자 일꾼이 새해 3월쯤 낼 생각으로 머리품을 한 달째 팔아오고 있다는 것.

이날 선생이 뒷산에서 캐온 송이버섯 판 돈은 이분들의 품삯에 보탠다고 했다. 우리말집 선보일 그 날이 몹시도 기다려진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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