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솔의 또 다른 모습
외솔의 또 다른 모습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1.10.07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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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일인지는 기억도 잘 안 난다. 그분이 보통나이 77세 되던 1970년 3월에 돌아가셨으니 그 앞의 일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분을 만난 곳은 텔레비전 화면 속이었고, 처음이자 마지막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매우 놀랐다. 가수 ‘패티 김’과 그녀의 노래를 너무 좋아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방송사 카메라는 노래하는 패티 김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그분의 모습을 따라가고 있었다. <사랑하는 마리아>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람>…. 패티 김이라면 나도 좋아하는 가수인지라 텔레비전에 빠져드는 동안은 그분과 동질감을 나누기도 했다.

‘외솔 최현배 선생(1894.10.19∼1970.3.23)’ 하면 어쩐지 차가운 분위기가 먼저 느껴진다. ‘한글이 목숨’이란 그의 붓글씨나 《조선민족갱생의 도》란 그의 책 이름이 그런 지레짐작을 심어준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선입견’일 뿐이다. 그의 또 다른 모습을 접하고 나면 생각이 달라진다.

외솔 선생과 패티 김 사이의 끈끈한 인연은 ‘패티 김-길옥윤 부부’에게 보낸 그의 편지글에서 훔쳐볼 수 있다. 라디오에 나온 작곡가 길옥윤이 짐짓 알려서 알게 된 일이지만, ‘그린비’와 ‘단미’란 고운 우리말을 선생이 부부에게 선물해 주었던 것이다. 무슨 뜻이었을까?

‘한글문화연대’ 누리집(2014.3.4)에 글을 올린 성기지 운영위원은 ‘그린비’란 아내가 지아비를 부르는 말로 ‘그리운 선비’를 줄인 부름말이고, ‘단미’는 지아비가 아내를 부르는 말로 ‘달콤한 여자’라는 뜻의 부름말이라고 했다. 이분은 또 ‘선비’는 남자를 공손하게 부르는 말이고, ‘∼미’는 여성을 뜻하는 우리말의 접미사라는 풀이도 덧붙였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 아름답고 예쁜 우리말이 오래 가질 못하고 책갈피 속에 묻히고 만 일이다. 다른 말도 그렇겠지만 입소문만 냈을 뿐 자꾸 써버릇하지 않으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말의 숙명인 탓에.

외솔 선생의 또 다른 모습은, 그가 한때 ‘정치지망생’으로서 외도를 한 일에서 찾을 수 있다. 6·25 한국전쟁이 나기 한 달 전인 1950년 5월, 선생은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장을 던진다. 출마 지역은 ‘울산군 을’ 선거구였지만, 아깝게도 낙선의 쓴잔을 마시고 만다. 인물작가 장성운 씨는 ‘울산의 인텔리들’ 두 번째 편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외솔과 함께 출마한 사람으로는 김홍조의 아들 김택천, 청년운동가 박태륜, 수산업 거부 백만술이 있었다. 이밖에도 김두헌, 오영출, 조용진, 임용길, 박명준, 고기철, 변동조, 박곤수가 출마했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 외솔은 부친(김홍조)의 후광을 입었던 김택천에 뒤져 차점으로 의회 입성에 실패했다. 당시 56세인 외솔은 울산군민들이 선거자금까지 마련해 주었으나 김택천이 8천800여 표를 얻은 데 반해 6천300여 표를 얻는 데 그쳤다.”

글쓴이는 “그 무렵 선거유세를 구경했던 사람들은 외솔이 명성과 학식에 비해 연설이 뒤졌다고 말한다”는 흥미로운 글도 뒤끝에 달았다. 궁금한 것은, 올곧은 선비 같기만 한 선생이 왜 정치할 꿈을 꾸었는지, 그 속뜻을 헤아리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추측은 해볼 수 있다.

외솔 선생은 8·15 광복 후 미군정청에 이어 대한민국 문교부에서도 편수국장을 지내면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쳤다. 요즘은 이른바 ‘서울대 학파’의 위세에 짓눌려 ‘명함도 못 내밀’ 처지가 돼 버렸지만, 해방정국 무렵에 실감했던 ‘힘의 논리’를 뼈저리게 느꼈던 때문은 아니었을까?

시월 열아흐렛날은 외솔 선생이 태어나신 지 127돌이 되는 날이다. 선생의 생가라도 한 번 둘러봐야겠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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