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진주만’-Tennessee, 레이프(벤 애플렉) 그리고..
영화 ‘진주만’-Tennessee, 레이프(벤 애플렉) 그리고..
  • 이상길
  • 승인 2021.09.30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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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진주만’의 한 장면.
영화 ‘진주만’의 한 장면.

 

어떤 영화음악은 평생 간다. 또 영화 속 어떤 장면도 평생을 간다. 그러니까 지난 추석 연휴 때였다. 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한 편의 영화가 갑자기 떠올랐는데 바로 마이클 베이 감독의 2001년작 <진주만>. 요즘 1, 2차 세계대전에 관심이 많아 유튜브를 통해 관련 영상들을 많이 찾아보던 중 그 영화가 갑자기 당겼던 거다. 실은 유튜브 알고리즘이 안내해줬다. 귀신같은 놈. 아무튼 그 순간, <진주만>을 대표하는 브금(BGM)으로 천재 영화음악가인 한스 짐머가 작곡한 ‘Tennessee’가 너무 듣고 싶어졌고, 영화 속 최고 명장면으로 전투를 마친 레이프(벤 애플렉)가 P-40 전투기 위에서 일어서는 장면도 간절했다. 바로 사진 속 저 장면이다.

물론 그 자리에서 바로 유튜브를 통해 그 음악과 그 장면만 찾아보면 됐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그게 너무 싫더라. 특히 중반부를 넘어서야 등장하는 레이프의 신은 거기까지 가기 위해 거치게 되는 수많은 감정들이 너무 아까웠다. 그 감정들을 거치고 난 후 맞이하게 되는 레이프의 신은 감흥이 훨씬 더 큰 법. 해서 난 그날 밤, 추석 선물로 받은 포도주를 한잔하면서 책상에 앉아 장작 3시간짜리 영화를 20년 만에 처음부터 다시 보게 됐다. 오로지 그 장면을 맞이하기 위해. 그리고 그 과정은 대략 이렇다.

주인공인 레이프와 대니(조쉬 하트넷)는 둘 다 파일럿을 꿈꾸며 어려서부터 같이 자란 절친이다. 다만 대니는 불우한 집안 환경 탓에 다소 의기소침한 면이 있었고, 리더십이 강한 레이프가 그런 대니를 어려서부터 늘 끌어주고 지켜줬다. 청년이 된 둘은 나란히 미공군 파일럿이 되는데 바야흐로 전 세계는 2차 세계대전의 포화에 휩싸여 있었고, 평소 정의감이 투철했던 레이프는 대니 몰래 유럽 전선에 지원하게 된다.

그런데 유럽으로 떠나기 직전 레이프는 미해군 간호장교로 아름다운 에벌린(케이트 베킨세일)을 만나 연인이 된다. 하지만 이미 유럽전선 투입이 결정된 레이프는 사랑하는 에벌린을 하와이 진주만에 남겨둔 채 유럽으로 떠난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전투 도중 바다로 추락하게 되고, 남겨진 에벌린에게는 친구 대니에 의해 전사통지서가 전해진다.

레이프가 떠나고 3개월이 지났지만 그를 잃은 슬픔에 여전히 힘들어하는 에벌린. 그런 그녀를 이젠 대니가 지켜주게 된다. 에벌린이나 대니나 레이프의 빈자리를 이겨내기 위한 운명 같은 사랑이었고, 에벌린은 결국 임신까지 하게 된다.

그런데 그 무렵, 죽은 줄 알았던 레이프가 돌아오게 된다. 바다에 추락한 뒤 오로지 에벌린만을 생각하며 스스로 목숨을 건졌던 것. 다만 독일군 점령지여서 살아있다는 소식을 에벌린에게 빨리 전하질 못했던 거다. 살아 돌아온 레이프는 당연지사 대니의 여자가 돼 있는 에벌린을 보고 크게 낙망하고 대니와 해변 술집에서 주먹다짐까지 한다. 하지만 결국 화해를 하게 되는데 그 다음 날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벌어진다. 방심한 틈에 시작된 일본 전투기들의 무차별 공습에 하와이 진주만은 쑥대밭이 되고, 레이프와 대니는 숨겨진 비행장을 찾아 가까스로 P-40 전투기 2대를 띄우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탁월한 팀웍과 조종술로 10여대의 적기를 격추한다. 전투가 끝나자 레이프와 대니는 유일하게 일본의 공습에 맞선 파일럿으로 영웅이 됐고, 그들이 비행장에 착륙하자 정비사인 얼(톰 시즈모어)은 먼저 착륙해 전투기를 빠져나온 대니에게 존경을 표시하듯 높임말로 이렇게 묻는다. “누구한테서 비행을 배우셨죠?” 그러자 대니는 “제 친구요”라고 대답하면서 뒤에 있는 레이프를 돌아본다. 그러자 저 사진에서처럼 전투기에서 레이프가 일어선다. 크! 글로 쓰면서도 소름 돋네. 저 장면이 너무 좋아 난 한동안 레이프처럼 계속 흰면티에 셔츠를 열어서 입고 다니기도 했었다.

한편 레이프의 신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20년 전에는 못 느꼈던 걸 새롭게 느끼기도 했다. 바로 에벌린역의 케이트 베킨세일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봤던 것. 그 때는 그저 그런 여배우로 보고 넘겼는데 20년 만에 다시 본 그녀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아마도 여배우 취향이 바뀐 듯. 심지어 내가 아는 누군가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까지 했더랬다.

영화는 인생이다. 때문에 우리들 인생에도 잊지 못할 어떤 장면이나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그 장면과 순간들은 기억 속에서 영원하지 않을까. 왕가위 감독의 <아비정전>에서 아비(장국영)도 매점 판매원인 수리진(장만옥)을 유혹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는 수리진과 함께 자신의 시계를 바라보며 1분의 시간이 흐르길 기다린다. 그런 뒤 이런 말을 건넨다. “방금 우린 1분의 시간을 함께 했어요. 이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고, 영원할 거예요.” 2001년 6월 1일 개봉. 러닝타임 177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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