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미니센스’-과거라는 마약
영화 ‘레미니센스’-과거라는 마약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1.09.02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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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는 글입니다.

과거는 마약이다. 우린 모두 과거에 중독된 체 살아간다. 왜? 그나마 과거는 안전하기 때문. 언제 어디서 고통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현재와 미래에 비해 과거는 마법을 부리듯 고통마저 추억으로 흡수해 버린다. 아무리 아픈 기억이라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추억으로 탈색된다. 대신 아픈 기억은 이제 현재나 미래를 가늠하는 잣대가 된다. 특히 현재를 판단할 때 과거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며 미래를 예측한다. 하긴. 한치 앞도 못 내다보는 인생인데 과거밖에 의지할 게 더 있나. 매사 과거에 중독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닐까.

한편 지나간 행복만큼 튼튼한 건 없다. 미래의 행복은 기약이 없고, 현재의 행복은 흔들릴까 늘 불안하지만 과거의 행복은 집에 고이 모셔다 놓은 보물처럼 안전하다. 생각날 때 한 번 씩 꺼내보면 된다. 역시나 과거에 중독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해서 영화 <레미니센스>는 주인공 닉(휴 잭맨)의 이런 나레이션으로 시작된다. “흔히들 과거가 우릴 붙잡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잊을 수 없는 과거가 있다면 실은 우리가 붙잡고 있는 거다.”

닉은 탐정이다. 그런데 하는 일이 조금 묘하다. 수면 기계를 통해 의뢰인의 과거 어느 기억을 마치 꿈을 꾸듯 생생하게 찾아주는 일을 하고 있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으로 도시의 절반이 바다에 잠겨버려 사람들은 이제 좋았던 과거를 추억하는 일에 집착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었다. 그 지경 속에서도 도시가 물에 잠기기 전처럼 마른 땅위에서 여전히 호사를 누리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었는데 바로 돈 많은 재벌들이었다.

이건 현실에서도 마찬가지 아닌가. 가진 자들은 돈으로 현재의 행복을 사지만 가지지 못한 이들은 늘 좋았던 추억에 기대 살아간다.

그러거나 말거나 단조롭던 닉의 인생은 잃어버린 귀걸이를 찾으려는 고객 메이(레베카 퍼거슨)의 등장으로 확 바뀌게 된다. 메이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것. 메이는 뒷골목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였다. 둘은 결국 연인이 되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지만 어느 날 메이가 갑자기 사라지면서 닉의 인생은 곤두박질치고 만다. 메이를 찾기 위해 닉은 이제 자신이 직접 수면 기계로 들어가 메이와의 추억 여행을 하며 메이가 남긴 흔적들을 통해 단서를 찾아나간다. 그러면서 메이의 충격적인 과거가 조금씩 밝혀지게 되고, 그럴수록 닉은 메이에게 더욱 집착하게 된다.

집착은 중독이다. 그리고 <레미니센스>에서 눈 여겨봐야 할 중독은 3개. 지구온난화로 세상이 엉망이 된 후 좋았던 ‘과거’에 중독돼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런 그들에게 몰래 팔렸던 바카라는 ‘마약’, 그리고 메이에 대한 닉의 ‘사랑’이다.

하지만 갑자기 사라진 메이에 대한 닉의 집착은 과거나 마약과는 조금 달랐다. 분명한 목적이 있었던 것. 메이의 충격적인 과거가 하나씩 드러나면서 자신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까지 알게 되지만 닉은 메이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메이의 진심을 확인하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던 것. 그리고 마침내 메이가 자신에게 남긴 말을 듣게 된다. 그 말은 이거였다. “우리 같은 사람에게 사랑은 빠지는 게 아니라 늘 곤두박질치죠. 하지만 사랑이 그래선 안 돼요. 땅 속 깊은 곳으로 침몰하는 게 아니라 더 높은 곳으로 상승해야 해요.”

그랬다. 시궁창 같은 삶이었지만 메이는 닉에 대해서만큼은 진심어린 사랑을 남기고 떠났던 거다.

그렇게 진심으로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기억 하나면 사랑은 충분하고 이미 완성된 게 아닐까. 실제로 닉은 남은 삶을 수면 기계 안에서 메이와의 추억을 끊임없이 반복 재생하면서 늙어갔다.

과거라는 마약에서 사랑의 추억은 가장 강력하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랑의 추억도 아픔이나 고통 없이 만들어지진 않는다. 그건 메이에 대한 닉의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사랑은 검(劍)과 같아서 늘 상처를 주기 마련. 자신이든 상대방이든.

해서 마약을 끊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듯 과거의 아픔을 딛고 다시 사랑하기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사람은 대개 그렇게 성장해 간다. 거의 예외 없이. 미국의 심리학 박사이자 작가인 M. 스캇 펙도 이렇게 말했다. “진정한 사랑은 영원히 자신을 성장시키는 경험”이라고.

2021년 8월 25일 개봉. 러닝타임 1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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