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홍, 붉은 꽃잎 물결
백일홍, 붉은 꽃잎 물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1.08.09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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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무더위에 새들도 울음을 멈추고 좀처럼 날지 아니한다. 하지만 절기는 어김없이 자기 얼굴을 드러낸다. 가을로 접어든다는 입추(立秋)가 사흘 지났다. 입추에 관한 농부의 속담이 있다. ‘입추가 되면 귀밝은 청삽사리 강아지 어미 곁에서 두 귀 쫑긋 세워 밤새 벼 이삭 영그는 소리 듣는다.’는 말이다.

입추부터 벼는 서서히 이삭이 생기고 우유 즙이 생기기 시작한다. 경험 있는 참새는 때를 기다린 듯 이삭 패기를 기다려 즙을 빤다. 세시풍속 백중(伯仲)이 되면 농부는 비로소 호밋자루를 내려놓는다. 바쁜 일을 거의 마쳤다는 의미이다. 백중을 다른 말로 ‘호미 씻기’라고 표현하는 이유이고, ‘머슴 날’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강아지도 벼 이삭 영그는 소리를 들을 정도이니 논마다 풍년을 알리는 용기(龍旗)를 세우는 행사는 당연할 것이다. 절기는 정확하다. 하늘이 높아진다. 백로가 높이 나는 모습이 자주 관찰된다. 삼호대숲에서 번식한 백로류 7종은 7월 중순 올해 최대 약 4천500마리의 정점을 찍고 하루가 다르게 조금씩 개체 수가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난다.

지금 울산은 백일홍의 붉은 물결이 넘실대고 있다. 현재 태화강국가정원의 모습이다. 붉은 꽃잎은 마치 붉은 천을 깔아놓은 듯하다. 매일 지나치는 사잇길이지만 걸을 때마다 뿌듯하다. 오늘 아침의 백일홍 정원은 더욱더 새롭게 느껴진다. 비 내리는 밤을 지낸 탓인지 꽃잎마다 붉음을 더한다.

예로부터 붉음은 축귀(逐鬼=삿된 기운을 쫓음)를 상징한다. 불단에 매일 올려지는 마지(摩旨=부처의 공양) 보(補=덮개)가 붉은 이유이다. 우리나라 가정의 화단에 접시꽃, 채송화, 맨드라미, 도화, 석류, 앵두, 봉선화에다 심지어 능소화까지 붉은 꽃을 피우거나 붉은 열매를 맺는 풀과 나무를 심는 이유이다. 백일홍, 배롱나무의 붉은 기운이 코로나19의 삿된 기운을 멀리 쫓기를 기대한다.

예부터 붉은 것은 덩굴풀 꼭두서니에서 얻었다. 한자는 ‘천(?)’이다. 꼭두서니에서 얻은 진홍색 물감이 마치 저녁 무렵 서쪽 하늘을 물들이는 저녁놀과 같다고 해서 그러하다. 붉은색의 활용은 우리나라보다 중국에서 더 다양하다. 중국 영화 ‘집으로 가는 길’에서 새로 지은 학교의 대들보에 붉은 천을 감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나라는 화재를 예방하는 방편으로 물에서 사는 용과 거북 혹은 학을 글자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린다. 하지만 중국은 화재보다 복을 우선순위에 둔다. 복이 가득 들어오기를 바라는 의례이다.

중국의 다른 영화에서도 같은 맥락의 붉은 천이 사용되는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 ‘붉은 수수밭(1988)’에서 시집가는 가마는 붉은색이다. 처녀의 머리에 붉은 천을 덮어 얼굴을 가린다. 천을 벗으면 불행해진다는 속설로 나온다. ‘국두(1990)’에서 주인공 국두는 머리에 붉은 천을 수건처럼 쓴다. 죽은 남편의 관은 붉은색을 사용한다. ‘홍등(1992)’에서도 시집온 사람의 얼굴에 가렸던 붉은 천이 벗겨진다. ‘영웅(2002)’에서는 죽은 사람의 운반구 상여 위의 주검에 붉은 천을 덮는다.

중국의 결혼 풍속 중에는 쩌우훈(走婚=같은 집에 살지 않고 잠만 함께 자는 윈난성 루구호 모쏘 족의 혼인형태)이란 것이 있다. 남자가 여자 집을 찾을 때는 반드시 허리에 붉은 천을 두른다. 영국에서는 고관의 예복 색이 진홍색(scarlet)이다. 명정(銘旌=다홍 바탕에 흰 글씨로 죽은 사람의 품계·관직·성씨를 기록한 기)은 붉은 천에 흰 글씨를 쓴다.

석 달 열흘 백일 동안 붉음을 간직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 백일홍(百日紅)이다. 백일홍 붉은 물결의 식물생태에 축귀 인문학을 입혔다. 장화 신고, 우산 들고, 망원경 매고, 관찰기록부 들고, 까막까치 반기는 백일홍 붉은 꽃잎 넘실대는 사잇길을 걸었다. 어쩔 수 없는 ‘코로나와 함께’라면 집에서 짜증을 내고 성화를 부려서 무엇하겠는가? 차라리 태화강국가정원 백일홍 정원에서 축귀진경(逐鬼進慶)의 좋은 하루를 보낼 일이다.

김성수 조류생태학 박사·철새홍보관 관장·울산학춤보존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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