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니 핑크’-오르페오와 함께 춤을
영화 ‘파니 핑크’-오르페오와 함께 춤을
  • 이상길
  • 승인 2021.07.22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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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니 핑크'의 한 장면.
영화 '파니 핑크'의 한 장면.

 

영화가 시작되면 주인공인 파니 핑크(마리아 슈라더)의 인터뷰 장면이 바로 등장한다. 결혼정보회사에서 배우자를 소개받기 위해 자신을 소개하는 자리였는데 그녀의 모습이 그리 의욕적이진 않다. 파니는 이렇게 말한다. 미리 말하지만 좀 길다.

“못 하겠어요. 나 자신을 이렇게 팔 순 없어요. 여자의 행복에 꼭 남자가 필요한 건 아니죠. 하지만 올해 서른이 되고. 혹시 이런 말 아세요? 여자가 서른 넘어서 결혼할 확률은 원자폭탄에 맞을 확률보다 낮다. 전 혼자 살아요. 한 4년 정도 됐죠. 아주 좋아요. 그래요! 혼자 사는 게 좋아요. 하지만 원했던 건 아니예요. 사귄 남자가 둘 있었죠. 두 번째 남자와 헤어진 후 91년에 에이즈 검사를 받았는데 음성이었죠. 그 후 아무도 안 만났어요. 그 후 만난 남자들은 결혼했거나 호모였어요. 더 이상 시간과 정력을 투자하고 싶지 않았죠. 정말 낭비죠. 커피나 마시러 가고. 첫 시작은 항상 커피 한잔으로 이뤄지죠. 밥 먹으러 가고 얘기하고, 같이 자고. 모든 게 다시 시작됐죠. 담배 피우고, 속옷을 사고. 헬스클럽도 다니고, 냉장고 안엔 항상 맥주를 채워두고. 남자의 고양이 알레르기 때문에 고양이를 거북이로 바꾸고. 그러고 나면 남자는 너무 가까워진 것을 겁내기 시작하죠. 그리 매력적인 이야기는 아니죠? 나 자신조차도 날 사랑하는 건 힘들 것 같아요.”

한때 여자나이 서른을 노처녀의 기준으로 삼았던 적도 있었다. 허나 지금은 택도 없다. 시대가 변해 이젠 서른이 넘어도 아무도 노처녀라 말하지 않는다. 아니 지금 세상엔 결혼 자체가 필수가 아닌 선택. 해서 영화 <파니 핑크>는 명작이지만 지금 보기에는 다소 정서적인 이질감이 느껴진다. 게다가 캐스팅도 엉망이다. 주인공 파니 핑크가 역할과는 다르게 쓸데없이 매력적이기 때문. 아니 어딜 봐서 남자가 없어 보이나?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예쁜데다 푼수끼까지 탑재해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그랬거나 말거나 이 영화 깊이가 장난이 아니다. 또 사랑이야기 같지만 실은 우리들 인생에 대한 이야기다. 뭐 그렇다 해도 위에서 파니가 장황하게 늘어놓은 대사처럼 사랑은 인생에서 가장 큰 일. 너무 좋아서 너무 아프니까. 그랬다. 파니는 지금 남자가 필요 없는 게 아니라 또 다칠까봐 사랑을 하고 싶진 않지만 사랑은 받고 싶은 거다. 시쳇말로 지랄도 풍년이다. 해서 친구인 오르페오(피에르 사노우시 블리스)는 그런 파니를 향해 다그치듯 이렇게 말한다. “누굴 위해서 한번이라도 희생해 본 적은 있어? 항상 자기 생각만 하지. 사랑받고 싶어 안달하면서” 맞다. 진짜 사랑은 희생이다. 또 받는 게 아니라 하는 거고.

참 오르페오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남자사람친구로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처음 만났다. 흑인 점성술가였고, 게이였다. 또 죽을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는데 우연히 파니의 연애점을 봐주게 되면서 가까워지게 됐다. 그리고 파니는 오르페오가 점지해준 운명의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뽕(마약)맞은 사람처럼 날뛴다. 실제로 뇌파학에 따르면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들 뇌의 상태는 마약할 때와 같다고 한다. 허나 마약은 늘 극심한 고통의 금단증세를 동반하기 마련. 결국 파니도 좋았던 만큼 비슷한 양의 슬픔을 겪게 된다.

다신 사랑하지 않을 거라 다짐했건만 또 겪게 된 사랑의 고통 앞에 파니는 한 동안 산송장처럼 지낸다. 아니 그 전부터 파니는 죽음을 미리 경험하는 강좌를 듣고 있었는데 심지어 관까지 짜서 집에 두고 그 안에서 잠들곤 했었다. 아무튼 실연의 아픔으로 힘들어하는 파니의 생일날 오르페오는 해골옷을 입고 깜짝 파티를 열어준다. 그리곤 같이 춤도 춘다. 그런데 실은 오르페오도 며칠 전 사랑했던 남자와 헤어진 상태였다. 힘든 건 마찬가지였던 것. 해서 그는 지금 파니에게 슬픔 속에서도 춤을 추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또 샴페인이 반쯤 찬 유리잔을 같이 바라보며 이렇게 물은 적도 있었다. “반이 찼어? 비었어?” 그 질문에 파니는 “반이 비었다”하고 그녀의 대답에 오르페오는 “그러니까 니 인생이 그 모양인 거야”라고 한다. 이미 가진 건 보질 못한다며. 죽음을 앞둔 오르페오에게 단지 남자로부터 사랑받지 못한다는 이유로 공허해하는 파니가 한심했던 거다.

그렇다 해도 영화 속 파니의 대사처럼 서른을 넘기면 다들 삶은 레코드판처럼 돌아간다. 별 게 없다. 그나마 사랑은 별 건데 아픈 건 또 싫다. 어쩌지? 뭐 어쩌긴 어째? 우짜든동(어떡해서든) 파니처럼 계속 춤을 춰야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랑의 상처든, 사랑이 아닌 고통이든. 영화 속에서 파니도 오르페오가 떠난 뒤 그의 가르침대로 힘든 일이 있어도 춤을 추기 시작한다. 미국의 저술가인 ‘비비안 그린’도 이렇게 말했다. “인생이란 폭풍우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빗속에서 춤을 추는 것이다.” 1995년 10월 21일 개봉. 러닝타임 104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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