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시절에 대한 소고(小考)-영화 ‘블랙위도우’
호시절에 대한 소고(小考)-영화 ‘블랙위도우’
  • 이상길
  • 승인 2021.07.15 23: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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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블랙위도우’ 한 장면.
영화 ‘블랙위도우’ 한 장면.

 

세상일이란 게 그렇다. 평범했던 무언가가 평범해 지지 않게 되면 그제야 그때 그 평범함의 가치를 제대로 깨닫게 된다. 마치 공기가 사라져봐야 공기의 고마움을 알게 되듯. 사실 난 세대가 거듭될수록 세상은 점점 더 좋아질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우리 이전 세대보다는 우리가, 또 우리보다는 우리 다음 세대가 더 행복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가 직접 겪었듯 문명의 발달은 인간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만들었고, 그런 만큼 즐거움의 가짓수도 점점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금의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는 그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됐다. 코로나19라는 생각지도 못했던 변수의 출현으로 근현대사 통틀어 어쩌면 내 또래가 가장 행복한 세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우리 세대가 그렇다. 적당히 발달한 문명 속에서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다 겪었고, 경제성장 속에서 배고픔도 모르는 세대였기 때문이다. 또 지금의 20·30대가 마스크에 갇혀 지내고 있는 반면 나의 20·30대는 90년대 대중문화의 중흥기를 거쳐 2002한일 월드컵이라는 아마 다시는 오지 않을 축제까지 겪었다. 마스크? 학창시절 학교에서 먼지 청소 할 때나 꼈다.

하지만 연애를 하지 않는 바엔 이 모든 건 그냥 사는 것이어서 그 특별함을 그땐 제대로 몰랐었다. 허나 치사율 1.4%의 바이러스에 우리들의 천부적 기본권이 이리도 쉽게 제한되는 현실을 겪으면서 그게 얼마나 귀한 시간들이었고 태평성대 시절이었는지 제대로 깨닫고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건 마치 세종대왕 재위 기간 동안 조선의 백성들이 누렸던 삶에 비견될 만하지 않을까 싶다. 세종실록에도 기록돼 있지만 ‘세종 30년 재위 기간 동안 백성들은 사는 걸 즐겨했다’고 한다. 맞다. 나도 그 시절, 사는 걸 즐겨했던 것 같다. 왜냐면 그땐 팔자 좋게도 꿈과 사랑 외에는 별다른 고민거리가 없었거든.

아무튼 세종 이후 아버지처럼 괜찮은 왕이었던 문종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떴고, 그 뒤를 이은 어린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처참히 죽었다. 이후 수양대군은 세조가 됐는데 탐욕스럽든 말든 백성들 입장에서 세조는 나름 괜찮은 왕이었다. 하지만 그 뒤 태어난 아주 운 나쁜 백성들은 미치광이 연산군을 왕으로 모셔야했고, 심지어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까지 겪으며 단군 할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기도 했었다.

역사란 건 우리들 인생처럼 늘 좋고 나쁨이 반복돼왔고, 밀레니엄을 전후로 좋았던 그 시절을 뒤로 하고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 지 지구인의 한 명으로써 살짝 걱정도 된다. 섭씨 50도를 넘나드는 캐나다 폭염을 보면서 당장은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위기가 걱정이다. 이상한 눈으로 읽지 마시길. 학자들에 따르면 북극 빙하가 녹아서 그런 거고, 똑같이 북반구에 위치한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니까 걱정하지 않는 당신이 더 이상한 거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 와 제일 후회가 되는 건 그 좋았던 시절에 왜 난 그렇게밖에 즐기지 못했을까하는 아쉬움이다. 얼마 남지 않은 치약을 쥐어 짜내듯이 매순간 악착같이 행복을 찾아 냈어야 했는데 꿈과 사랑에 갇혀 그러질 못했던 거 같다. 근데 내가 생각해도 난 좀 이상한 놈인 게 이런 생각을 극장에서 <블랙 위도우>를 보면서 했다는 거. 스스로도 기가 차더라.

하지만 한편으론 그것도 이해가 되는 게 진짜 얼마 만에 큰 스크린으로 만나게 된 마블 슈퍼히어로 무비란 말인가. 원래는 2019년 4월 <어벤져스:엔드게임>에서 죽은 나타샤, 즉 블랙위도우(스칼렛 요한슨)를 위한 스핀오프 작품으로 빨리 개봉하려 했으나 코로나19 때문에 많이 늦어졌던 것. 그래서였을까? 진짜 보는 내내 시간이 만져질 정도로 제대로 즐겼던 것 같다. 심지어 눈물도 찔끔 났다. 마블 여성 히어로 중에는 섹시하고 파워풀한 완다(엘리자베스 올슨)를 제일 좋아하지만 더 이상 블랙위도우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굿바이. 나타샤.

꼴에 어려운 영화도 제법 보지만 솔직히 내 취향은 잘 만들어진 블록버스터다. 해서 지금 갖고 있는 내 삶의 당면 목표 가운데 하나가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 시리즈가 종결될 때까지 살아있는 것. 아니 솔직히 그 후로도 그런 작품들을 한 편이라도 더 보기 위해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 방금 웃었죠? 칫.

매주 블록버스터 영화가 적어도 한 편씩은 개봉하던 시절,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다니던 시절, 술 한 잔 걸친 뒤 마스크 없이 서로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사랑한데이”라고 말해주던 시절. 그게 사실은 평범하거나 당연한 게 아니었던 거다. 해서 다시 그런 시절이 온다면 진짜 얼마 남지 않은 치약을 꾹 눌러 짜내 쓰듯 난 제대로 즐길 거다. 그나저나 캡틴, 토르 다들 잘 있지?

2021년 7월 7일 개봉. 러닝타임 134 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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