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나요”-영화 노매드랜드
“길에서 만나요”-영화 노매드랜드
  • 이상길
  • 승인 2021.07.01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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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매드랜드'의 한 장면.
영화 '노매드랜드'의 한 장면.

 

스포일러가 있는 글입니다.

<노매드랜드>에서 미국 네바다주 엠파이어 탄광 지역에 사는 주인공 펀(프란시스 맥도맨드)은 암으로 남편을 잃고 홀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세계적으로 석고보드 수요가 감소하면서 탄광은 폐쇄돼버렸고,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씩 엠파이어를 떠났다. 얼마 뒤 그 탄광은 우편번호까지 말소되면서 이젠 마을 자체가 아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사실상 홀로 남게 된 펀. 그녀는 남편과의 추억이 가득한 짐들을 창고에 넣어둔 채 밴 하나 달랑 구입해 노매드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노매드(nomad)는 유목민을 뜻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삶은 점점 매말라간다. 보통 마흔을 넘기면 이미 해볼 거 다 해보고, 겪을 거 다 겪어본 탓에 새로울 게 별로 없다. 해서 점점 탄력을 잃어가는 마음은 점점 사막화가 진행된다. 네바다주엔 사막이 있었고, 시종일관 먹먹한 펀의 표정은 공허한 사막과 몹시도 닮았다.

허나 펀도 한때는 그렇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무작정 남편을 따라 도망치듯 집을 뛰쳐나왔고, 둘은 몰래 결혼식까지 올린 뒤 엠파이어에 정착했었다. 사랑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5월의 녹음(綠陰)처럼 가장 빛나던 순간에 남편과 함께 읊었던 결혼서약서를 그녀는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

펀은 그걸 유랑생활 도중 길에서 만난 한 청년에게 읊어줬다. 청년은 실연 때문에 노매드 생활을 하고 있는 듯 했고, 펀은 그녀에게 시(詩)를 써서 보내라며 청년에게 자신의 결혼서약서를 읊어줬던 것이다. 그건 이러했다. “그대를 여름날에 비유해도 될까요? 당신은 여름보다 더 사랑스럽고 온화합니다. 거친 바람이 사랑스런 5월의 꽃봉오리를 흔들고, 여름의 약속된 시간은 너무 짧네요. 때로 천국의 눈은 뜨겁게 타오르고, 때론 그 황금빛 안색이 금세 어두워집니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시들기 마련이고, 자연의 섭리에 따라 초라해지지만 그대의 영원한 여름은 바래지 않고, 그 아름다움은 영원할 것이니 죽음조차 그대를 가두지 못할 것입니다. 그대가 이 불멸의 서약 안에 살고, 우리가 숨 쉬고 볼 수 있는 한 이 서약은 우리에게 생명을 줄 것입니다.”

그랬다. 사실은 먼저 떠난 남편에게 다시 읊어준 것이었다. 그때 그 5월의 신부는 상실감에 이젠 사막을 떠도는 유랑자가 되어버렸고, 먼저 간 남편에 대한 그리움은 사막이 내린 황량하기 그지없는 펀의 삶에 여전히 오아시스 같은 것이었다. 나이가 들면 누구든 추억으로 산다. 잊지 않으면 존재한다.

허나 끝없이 펼쳐진 사막의 풍경은 공허하지만 다채롭다. 아니 쓸데없이 아름다웠다. 사막 한가운데 우뚝 솟은 바위산도, 군데군데 핀 풀 한 포기도, 때론 굽이치는 바다도 새롭고 경이로웠다. 누가 사막을 외롭다고 했던가. 그곳엔 사람들이 있었고, 펀은 그들을 통해 삶을 알아갔다. 항암치료를 포기하고 전국을 여행하는 스완키(샬린 스완키), 아들을 잃은 슬픔을 노매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돕는 일로 상처를 치유하는 밥(밥 웰스), 아들과의 관계가 불편해 노매드 생활을 하는 데이브(데이빗 스트라탄) 등이 그들이었다.

죽어가면서도 병원이 아닌 유랑자 생활을 택한 스완키가 펀에게 말한다. “난 금년에 75살이야. 꽤 잘 살았다고 생각해. 정말 멋진 것들도 봤어. 콜로라도 호수에서였는데 내 카약 2미터 위로 착륙하는 크고 하얀 펠리칸들. 커브를 돌면 절벽이 나오는데 수 백 마리의 제비 둥지가 절벽에 붙어 있었어. 온 사방으로 제비가 날면서 물에 비치는데 마치 내가 제비와 함께 나는 것만 같았지. 정말 멋있었어. 그 순간, 이제 충분하다고 느꼈어. 내 인생은 완전했어. 만약 그때 죽었어도 정말 괜찮았을 거야.” 하긴 행복도, 죽음도, 인생도 결국은 순간이니까.

유랑자 집단의 정신적 지주였던 밥은 홀로 떠나려는 펀에게 이런 작별인사를 했다. 아니 그는 작별인사는 절대 하지 않는다며 이리 말했다. “나중에 봐요. 길에서 만나요.” 또 아들과 화해를 한 뒤 마침내 아들집으로 들어간 데이브는 펀에게 “좋아한다”면서 그녀가 자기 집에 계속 머무르길 원했다. 하지만 펀은 새벽어둠이 채 걷히기 전 그 집을 나와 다시 밴에 몸을 실고 황량한 사막을 내달렸다. 인생은 집이 아니라 길이니까. 사막 한 가운데 길게 뻗은.

2021년 4월 15일. 러닝타임 108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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