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누구냐
너는 누구냐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1.06.30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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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고백하건데, 지금까지 수업을 하면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이름을 모두 다 기억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가장 곤란한 문제의 하나가 바로 아이들 이름을 외우는 것이다. 사실 수업을 하다 보면 수업 시간 태도는 어떤지, 어떤 아이들과 장난을 치는지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 이따금 수업 시작 전에 교실에 들어가거나, 수업을 마치고 교실에 잠시 머무르게 되면 아이들이 누구와 무엇을 하는지 한 번씩 돌아본다. 아, 저 학생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저 아이는 누구랑 친하구나. 그러면서 어떤 아이들인지 알게 된다. 그런데 이름은 참 외우기 어려웠다.

필자의 경우 아이들과 탐구형 수업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이 ‘ㄷ’자 모양으로 교실에 둘러앉아 철학 소설이나 교과서와 같은 텍스트를 읽고 나서 탐구 질문을 만들고 토론을 하는 방식이다. 아이들이 질문이나 자신의 의견을 발표할 때마다 발표 내용과 발표자를 칠판에 간단하게 기록한다. 교실 탐구에 기여했다는 일종의 표시인 셈이다. 이렇게 수업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이름을 묻게 된다. 그러면 어느 정도 이름을 외울 법도 한데 결과가 신통치 않다.

수업 시간에 발표를 잘 안 하는 아이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발표를 자주 하는 아이들의 이름도 헷갈릴 때가 있었다. 마음을 굳게 먹고 아이들의 이름을 외우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을 시도했다. 돌아가며 철학 소설을 읽을 때도 지금 읽는 아이는 누구지. 그다음 아이는 누구지 생각했지만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렸다.

올해는 5반의 수업을 맡고 있다. 150명 정도의 아이들이라서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한 가지 게임을 제안했다. ‘지금부터 너는 누구니라는 게임을 하자. 그 게임은 1달 동안 선생님이 너희들의 이름을 최대한 많이 기억하도록 하는 거야. 대신 수업에 방해가 되거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방법은 안 된다. 한 달 뒤에 선생님이 가장 많은 학생의 이름을 기억하는 반을 1등으로 해서 작은 상품을 줄게.’

한 일주일 정도는 정말 정신없이 지냈던 것 같다. 복도를 지나다니면 몇 명의 아이들이 쪼르르 달려와서 자기 이름이 무엇인지 반복해서 알려주곤 했다. 몇 번이나 돌아가며 자기 이름을 말하고 나서 시험 검사하는 선생님의 표정으로 ‘자, 우리 이름이 뭐예요?’라고 물어보면 선뜻 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내 모습이 수업 시간에 실컷 설명을 한 뒤 아이들에게 수업 내용을 질문했을 때 답변하지 못하는 학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을 외우는 데 영 부진한 필자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기 이름을 몇 번이나 알려주는 아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한 달이 지나고 결과를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다. 공동 1등이 두 반, 공동 2등이 두 반, 그리고 3등이 한 반이었는데 1등 반과 3등 반의 차이가 2명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몇 명을 맞췄는지는 비밀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아이들의 이름을 외우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인간적인 만남이 서로의 이름을 알아주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실 속의 수업은 만남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교실 현장에서 선생님과 학생 사이에 많은 마주침이 존재하지만 제대로 된 만남이 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교육적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 만남에 대해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인간이 관계를 맺는 방식을 ‘나-그것’의 관계와 ‘나-너’의 관계로 구별했다. 상대를 소유와 수단의 대상으로 보는 ‘나-그것’이 아니라 서로가 인격적으로 마주하는 ‘나-너’의 관계가 참된 만남이라는 것이다.

아이들의 이름을 알아가는 것만으로 참된 만남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이야기하는 것은 ‘저기, 아이야. 학생’이라고 부르는 피상적인 관계보다는 조금 더 진전된 모습일 것이다. 이런 만남을 통해 서로가 배우고 성장하는 게 아닐까?

정창규 고헌중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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