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드라미, 꽃이 스러지다-영화 ‘하얀 면사포’
맨드라미, 꽃이 스러지다-영화 ‘하얀 면사포’
  • 이상길
  • 승인 2021.06.10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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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하얀 면사포'의 한 장면.
영화 '하얀 면사포'의 한 장면.

 

수업이 시작되고 얼마 뒤 갑자기 교실 문이 열리면서 한 소녀가 들어온다. 어딘가 아픈 듯 초췌한 모습의 소녀는 스스로를 내팽개치듯 털썩 자기 자리에 앉지만 선생님은 45분이나 지각한 학생을 가만히 내버려둘 수가 없다. 이내 선생님은 자기 허락 없인 앉을 수 없다고 소녀를 다그치게 되고 그 말에 소녀는 도망치듯 다시 교실 밖으로 나가버린다. 참, 프랑스 어느 지방의 고등학교 철학 수업이었고 선생님의 이름은 프랑소와(브루노 크레머), 소녀는 마틸드(바네사 빠라디)였다.

그런데 잠시 뒤 점심시간, 학교를 빠져나가던 선생님은 버스 정류장 벤치에 쓰러져있는 소녀를 발견하게 된다. 주변 친구들은 울던 소녀가 갑자기 쓰러졌다고 말을 하고 선생님은 정신이 든 소녀를 태운 뒤 집에 데려다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선생님이 보든 말든 옷을 벗은 뒤 잠을 청하기 위해 침대 이불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소녀. 가르치는 학생이 걱정됐던 선생님은 일과를 마친 뒤 다시 소녀의 집에 오게 됐다. “좀 괜찮냐”는 선생님의 말에 잠에서 깬 소녀가 이젠 웃으며 말한다. “그냥 제 삶에서 가끔씩 생기는 일일 뿐이예요.” 그리고 소녀로부터 불우한 가정사를 듣게 된다. 아빠는 정신과의사지만 곁에 없었고, 우울증을 심하게 겪고 있는 엄마는 자꾸만 자살을 시도했던 것. 또 이혼을 한 듯 둘은 소녀만 남겨둔 채 멀리 가버렸다.

분명히 말하지만 처음엔 교사로서 책무 같은 것이었다. 선생님은 불쌍한 소녀를 다독이며 제대로 된 학생으로 키워내려 했다. 실제로 학문적으로 뛰어났던 소녀는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인해 점점 발전해갔다.

문제는 기댈 곳 없는 소녀가 선생님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 허나 프랑소와 역시 자신과 닮은 영혼을 지닌 아름다운 소녀를 거부할 수가 없었고, 결국 둘은 연인이 된다.

사랑이 꼭 도덕적일 필요는 없다. 아니 애초에 사랑은 도덕적이기가 어렵다. 사랑만큼 무책임한 게 어딨나.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맘대로 다가와 천국을 맛보게 한 뒤 언젠가는 나락으로 다시 떨어뜨린다. 영원하지 못할 바에 모든 사랑은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사랑은 식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파국. 해서 그건 흡사 로켓포로 하늘 끝까지 쏘아올린 뒤 낙하산 없이 지상으로 뛰어내리라고 하는 것과 같다. 때문에 이 땅의 지진이 지축을 뒤흔든다면 사랑은 두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린다. 정현종 시인도 <방문객>이란 시에서 이리 말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머어마한 일이다’고. 프랑소와와 마틸드의 금기된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있어 선생과 제자, 혹은 유부남과 어린 소녀라는 관계도, 심각한 나이 차이도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인간의 도덕 따위가 감히 가로 막을 수 있는 사랑이 아니었다. 하긴 그래봤자 우주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니니까. 또 그걸 따지려면 왜 이토록 아름답고 지적이며 매력적인 소녀가 그런 환경에서 초췌하고 불쌍하게 자랄 수밖에 없었는지부터 논해야 할 거다. 첫 식사자리에서 소녀도 선생님에게 말했다. “그들(부모)이 나를 만들었어요. 난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그랬거나 말거나 산은 산이고 물은 물. 사랑은 사랑이고 파국은 파국이다. 허나 소녀는 어렸지만 생각보다 꼿꼿했다. 갈 곳 없는 영혼의 소녀에게 유일한 안식처였기에 파국을 맞이한 뒤에도 소녀는 선생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소녀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을 때 선생님은 멀리 떠나온 자신을 그리움에 사무친 소녀가 건너편 창가에서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딱 3층 높이의 작고 외로운 방이었고, 그 곳엔 “미안해요”라는 말과 함께 벽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선생님. 죽음은 바다와 같아요.”

맨드라미라는 꽃이 있다. 세상 어느 꽃과도 닮지 않은 이 꽃의 꽃말은 ‘시들지 않는 영원한 사랑’이다. 한번 피면 서리가 내려 그 존재 자체가 흔들리는 시간까지 그 모습 그대로 자태를 뽐내다 마침내 스러지는 꽃이다. 해서 꽤 오래전 K본부의 영화소개 프로 중 애청 코너였던 ‘추억의 부스러기’에서 나레이션을 맡은 원호섭씨는 이 영화를 소개하면서 이런 시적인 표현으로 마무리 짓더라. ‘맨드라미꽃을 꺾는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먼발치서 올라와, 배경으로 올라와 붉은 듯 지나친 자줏빛 멍든 낯으로. 어쩌면 그것은 꽃이 아니어야만 했다. 맨드라미, 오직 한 사람의 꽃으로 명멸하는 꽃…’

1989년 12월 24일 개봉. 러닝타임 90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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