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난 척은 할 수 있을 때 마음껏 하는거야”-영화 ‘크루엘라’
“잘난 척은 할 수 있을 때 마음껏 하는거야”-영화 ‘크루엘라’
  • 이상길
  • 승인 2021.06.03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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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크루엘라’ 한 장면.
영화 ‘크루엘라’ 한 장면.

 

2006년 방영됐던 <환상의 커플>이라는 드라마에서 철수(오지호)의 초등학생 조카 준석(이석민)은 줄넘기 실기 시험에서 반 전체 1등을 하고 집에 돌아온다. 한껏 들떠서 상실(한예슬)에게 자랑질을 해대는 준석. 그런 준석에게 상실은 겸손에 관한 조언 대신 이렇게 말한다. “마음껏 잘난 척 해. 잘난 척은 할 수 있을 때 마음껏 하는 거야.”

전국적으로 나상실 신드롬을 일으키며 짜장면과 막걸리까지 동반 주가상승을 시켰던 <환상의 커플>이 방영된 지도 벌써 15년이 지났다. 개인적으로 극중 한예슬이 맡았던 ‘나상실’은 2013년 <응답하라1994>의 쓰레기(정우)가 등장하기 전까지 드라마 속 최애 캐릭터였는데 당시 상실에게 내가 푹 빠졌던 건 저렇게 가슴이 뻥 뚫리는 그녀의 시원한 대사빨 때문이었다. 물론 한예슬이란 배우의 미모도 한 몫을 했겠지만 솔직히 그 전까진 한예슬은 완전 비호감이었다. 예쁘면 뭐하나. 마음을 흔드는 게 없는데. 하지만 <환상의 커플>의 나상실이라는 캐릭터는 안하무인(眼下無人)인데도 밉지 않은 매력으로 내 마음을 완전히 흔들어버리고 말았다. 툭 하면 내뱉는 “꼬~라지하고는”부터 “지나간 짜장면은 다시 돌아오지 않아”나 “맛없는 걸 맛없다고 할 수 있는 당당한 어린이가 되는 게 뭐가 나빠” 등 분명 평범하진 않지만 뼈 있는 명대사들로 신선한 재미를 줬었다. 타인에 대한 겸손이나 배려라곤 찾아볼 수 없는 캐릭터인데도 뿜뿜하는 나상실의 매력은 어쩔 수가 없더라.

허나 따지고 보면 세상의 이치란 게 그렇다. ‘옳고 그름’과 ‘좋고 싫음’은 다르다는 것. 다시 말해 옳다고 꼭 좋을 순 없고, 그르다고 반드시 싫을 순 없다. 때론 ‘나쁜 남자’에게 끌리듯이 상실처럼 겸손이나 배려가 전혀 없는 나쁜 여자인데도 좋아질 수가 있다.

그렇다고 나는 뭐 짜더러 겸손하고 배려가 깊은 인간인이었던가? 사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습관적으로 나와도 괜찮다. 배려가 몸에 베인 사람. 다들 좋은 의미로 들어봤을 테다. 하지만 겸손은 다르다. 아니 겸손은 굉장히 어렵더라. 어떤 좋은 일로 인해 마음이 미쳐 날뛰는데도 겉으로 아닌 척 하는 게 너무 힘들었던 것. 스스로가 이중인격자 같았다. 때문에 어떨 땐 ‘에잇! 인간인 이상 진짜 겸손이란 게 가당키나 해? 이럴 바엔 그냥 크게 질러버릴까 보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더랬다. 그러다가 <환상의 커플>을 보게 됐고, 잘난 척에 대한 상실의 가르침을 듣게 됐다. 진짜로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또 깊이 생각해봤더니 상실의 말에는 일리도 있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잘난 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과연 얼마나 되냐는 말이지. 평생을 통틀어 내게 고통이나 괴로움을 주는 일이 수만 가지라면 잘난 척할만한 좋은 일은 과연 100가지나 될까 싶다. 그래서 상실이 그랬던 거다. 잘난 척은 할 수 있을 때 마음껏 하는 거라고.

아이돌 그룹인 EXID의 하니도 얼마 전 한 예능프로에 나와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더라. 브레이브 걸스 이전 원조 역주행 아이돌 그룹으로 ‘위아래’란 곡이 뒤늦게 떴을 때 어떤 기분이었냐고 MC들이 물었더니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산타클로스한테 선물을 받았는데 내 것이 아닌 것 같아 열어보지도 못하고 바라만 봤던 것 같아요. 그때 내 메신저 대화명이 일희일비하지 말자는 뜻에서 ‘일희일비(一喜一悲)’였거든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후회돼요. 일희일비할걸. 그냥 즐길걸.”

서론이 길었는데 영화 <크루엘라>를 보는 내내 십오 년 전 재밌게 봤던 드라마 <환상의 커플>의 나상실이라는 캐릭터가 자꾸 떠오르는 바람에 그리해봤다. 영화 속 주인공인 크루엘라(엠마 스톤)가 딱 그런데 영화 포스터에도 나오지만 그녀의 컨셉이 이거거든. “안녕, 자기? 보여줄 게, 내가 누군지. 난 원래부터 뛰어나고, 못됐고, 약간 돌았지.”

이렇듯 그녀 역시 상실처럼 진짜만을 말하더라. 누구든 남들 앞에 자신을 보여주고 싶어 하고, 또 자기만의 소질이 하나씩은 다 있으며 그의 마음속엔 선악이 공존한다. 그래서 가끔은 돌아이 기질이 발휘되기도 한다. 아니라고? 훗! 참, ‘크루엘라’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인 <101마리 달마시안>에 등장하는 악당으로 영화는 그녀가 오직 착함만을 강요받았던 에스텔라에서 선악이 공존하는 악당 크루엘라로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랬거나 말거나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란 게 착하고 겸손하면 더할 나위 없겠지? 하지만 진짜 겸손은 있을 수 없다고? 아니! 공교롭게도 난 진짜 겸손을 상실 역을 맡은 배우 한예슬로부터 듣게 됐다. 대한민국 전체가 나상실 신드롬으로 들썩였던 그 때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이 내 전성기인 거 같아요. 그러니 이제부터는 내려갈 일만 남았네요.” 하긴. 우주 만물은 끊임없이 변하니까.

2021년 5월 26일 개봉. 러닝타임 133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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