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살아보고요
더 살아보고요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9.05.04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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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중심가로부터 가까운 사찰에서 중 ·고등학생들이 주말(토요일)을 활기차게 보낼 수 있도록 해 줄 좋은 방법을 찾다가 하모니(harmony)교실을 운영하기로 하였다.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지도할 선생님들을 섭외하여 진행과정에 대한 준비를 하였고, 아이들이 좋아할 간식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만들었다. 이렇게 열심히 준비하여 열린 하모니교실의 프로그램은 탁구교실, 댄스스포츠교실, 한자교실, 영어로 말하기 교실, 자연학습교실, 꽃꽂이교실, 서예교실 등 다양하게 엮어서 각자의 취미를 살려갈 수 있도록 무척 애를 썼다. 그리고 당일에는 학교까지 가서 아이들을 직접 태워오고 마치면 데려다 주기도 했다.

하루는 댄스스포츠교실이 열리는 장소에서 여중생 몇 명이 놀고 있는데, 한 아이가 높다랗게 쌓아둔 방석 위에 올라가 있어서 “너는 참 활달한 성격이구나.” 라고 말을 붙이면서 물었다.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 하고 장래에 꿈, 희망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물었다. 그런데 묻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돌아온 “더 살아보고요.” 라는 대답에 너무 당황스러워 잠시 멍해졌다. 망치에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생각을 했다. 이럴 때는 뭐라고 해야 하나? 당돌하다고 나무래야 하나! 아니면 “맞아 아직 어리니까 살면서 천천히 생각하여라. 똑똑하기도 하지.” 라고 해야 할 것인지!

요즘 아이들 말하는 수준과 생각하는 정도의 차이를 가늠하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답잖게 어른스러운 아이를 두고 ‘아이 늙은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려운 생활 속에서 부모를 대신하여 동생들을 돌보며 집안일을 돕다보면 현실감각이 발달해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요즘도 간혹 어떤 질문에 답하는 어린이가 대견스럽게 자신이 처한 현실을 잘 이해하면서 이상과 목표를 명확하게 말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대견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전자와 후자의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나는데 왜? 그 원인은 무엇일까?

답은 나름대로 포괄적인 의미의 ‘관계’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 이유는 인간은 관계로 인해서 잉태되고 태어나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삶에는 여러 가지 관계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인간관계’라는 한정된 영역에서 생각해보자. 사람과 사람의 관계 그 중에서도 영향력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는 가족관계는 인격형성에서 절대적이다. 특히 커가는 아이들에게는 한석봉의 어머니나 신사임당처럼 어머니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에게 비춰지는 대중적인 어머니의 모습은 시대별로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우선 모두가 못살고 가난했을 때 특히 3~4대가 한 울타리에서 생활하던 시대의 어머니들은 아이들에게 “이 웬수 너그만 아니면…….” 하는 푸념을 했지만 아이들은 그 말을 잘 가려들을 줄 알았다.

그러다 1980년대에 접어들어 살기가 나아지면서 “너도 나처럼 살래, 누구누구는 잘하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 라고 하면서 자신이 못다 한 것에 대한 회한을 표출하거나 비교하면서 아이들을 다그쳤다. 그러다 산업사회에 진입하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성장기 예민한 아이들에게 “기간을 제시하면서 그 도안만 죽었다 생각하고 다른 것은 다 접어두고 열심히 공부나 해” 라고 한다.

이렇게 시대가 급변하는 가운데 다양한 속내를 가진 어머니들이 혼재하고 있는 만큼 각각의 영향권에서 자라온 아이들을 연령별로 살펴보면 그 가치기준이나 사고의 틀에 큰 차이가 있다. 그래서 요즘 아이들은 ‘너를 위해 열심히 기도 한다’ 고 말하는 어머니들을 엄청나게 부담스러워 한다고 하니, 이쯤에서 “더 살아보고요.” 라는 답은 참으로 현명한 대답(賢答)이었구나 싶다.

언제 또 다른 변화의 급물살을 타고 요구수준이 어떻게 바뀌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아이들이 자신의 이상이나 목표를 내세울 수가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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