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모(鷄母)와 부모(鳧母)의 양육과 교육법
계모(鷄母)와 부모(鳧母)의 양육과 교육법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1.05.31 21: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태화강국가정원 초화원에는 짙붉은 립스틱에 안개꽃 모자를 둘러쓴 울산 아가씨가 사진작가들을 맞느라 이른 아침부터 한밤중까지 쉴 틈이 없다. 아침이면 촉촉이 젖은 입술로, 낮이면 화사한 미소로, 밤이면 찬란한 조명으로 치장한 열정의 모습이 길손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국가정원 초화원의 오월 말 풍경이다.

막 유월에 접어들었다. 그동안 몇 차례 비가 내린 탓도 있지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붉은 꽃 열흘 못 간다)’ 현상이 나타났다. 어떤 정열보다 붉다던 양귀비 꽃잎들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맥없이 떨어져 나뒹군다. 이차돈의 하얀 피에 버금가는 희디흰 안개꽃 꽃잎들은 백설기에 쓴 곰팡이처럼 거뭇거뭇한 생채기만 안았다.

지난 삼사월의 초화원은 알락오리와 청둥오리, 흰뺨검둥오리들의 먹이 곳간이자 쉼터였다. 파릇파릇 보드라운 새싹들은 오리들을 토실토실하게 살찌웠다. 샛강 창포물에 목욕하고 생태습지 수련 꽃물에 몸단장을 끝낸 오리들은 아장아장 걷거나 휙 날아서 찾아든다. 태화들의 따스한 햇볕은 오리들을 화원에 배를 깔고 누워있거나 졸게 만든다. 하지만 대낮에 느닷없이 찾아든 세찬 바람과 소나기는 그나마 남아있던 적백(赤帛=붉은 비단)의 자존심마저 빼앗아간다.

아 옛날이여! 양귀비와 안개꽃은 지나간 옛 추억의 그림자만 가슴에 남겼다. 여명의 남산에서 뻐꾸기가 울면 대나무 숲속에서 잠자던 백로는 비로소 이슬 터는 기지개를 켜며 먹이터로 날아갈 준비를 서두른다. 매일 동천(東川), 서천(西川), 사군탄(使君灘), 무동(舞洞), 초천(椒泉) 중 어느 곳에선가 우아한 조반(朝飯) 분위기를 만들 것만 같은 그들의 날갯짓을 상상해본다. 그들은 매일 부지런하게 활동하기에 의식주의 여유를 갖는다는 생각도 떨쳐버릴 수 없다.

초화원의 빛이 바랠 즈음 태화강국가정원 생태습지와 샛강에는 경이로운 생명의 나들이가 시작된다. 오리 가족과 쇠물닭 가족의 나들이가 그것이다. 필자의 집에는 아홉 식구의 백봉 가족이 있다. 국가정원을 찾으면 아홉 식구의 오리 가족을 만난다. 그 틈새에 일곱 가족의 쇠물닭 가족도 만난다. 그들을 매일 만나다 보면 어느새 양육과 교육법을 터득하게 된다. 이해하기 쉽게 어미 닭을 계모(鷄母)라 부르고, 어미 오리를 부모(鳧母)라 부르기로 하자.

계모와 부모는 같은 조류이지만 병아리와 새끼의 양육과 교육법이 달랐다. 매년 되풀이해서 관찰한 결과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혹여 자녀 양육과 교육에 도움이 될까 싶어 몇 자 적는다. 먼저, 계모는 나가지 마라, 따라오너라, 받아먹어라 등 세 가지의 요구를 반복하고 있었다. 반면, 부모는 나가라, 앞서라, 스스로 찾아 먹어라 등 세 가지의 실천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계모는 하루종일 일정한 울음소리로 병아리의 행위를 제한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병아리가 삼일짜리 보폭으로 열 걸음이 채 안 되는 곳으로 멀어질 만하면 계모는 그사이를 못 참고 잦은 ‘꼬고곡∼’ 소리로 새끼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다. 그 소리를 들은 병아리들은 황급히 되돌아와 어미의 날개 속을 파고든다. 어미 닭은 언제든지 먹이를 물어다 병아리 앞에 떨어뜨린다. 병아리는 어미 닭의 부리만 바라볼 뿐이다.

그러나 부모는 계모와 달리 새끼오리에게 먹이를 결코 건네주는 일이 없었다. 대신 왜가리, 삵 등 포식자의 출현을 감지하는 사방 경계에 치중하고 있었다. 새끼들을 안전하고 먹이가 있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안내할 뿐이었다.

계모가 의존성을 가르치려고 했다면 부모는 독립성을 심어주려고 했다. 계모와 부모의 양육과 교육 방법이 각각 다르게 나타난 것이다. 계모는 오랜 기간 리더 역할을 맡았다, 부모는 간섭없이 새끼 뒤에 따라다니면서 서포터 역할만 했다. 병아리가 새끼오리보다 자립과 독립이 늦은 이유를 멘토인 자연이 가르쳐준 셈이다.

김성수 철새홍보관 관장·조류생태학 박사·울산학춤보존회 명예회장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