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루에서 들어본 ‘태화루의 역사’
태화루에서 들어본 ‘태화루의 역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1.05.30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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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8일, 한 줄의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29일 오후 태화루 누각에서 특강이 있다는 전갈이었다. 강의 제목은 <울산 역사 속의 태화루>였고, 강사는 뜻밖의 인사 신형석 울산박물관장이었다. 하지만 한동안 망설였다. 28일 오전에 코로나 백신을 맞은 터라 안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길은 어느새 태화루를 향하고 있었다. 누각에는 울산 역사를 사랑하는 마흔 남짓한 인사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것은 ‘코로나 맞춤형’ 자리 배치. 흡사 과거를 보러 온 응시생들이 정좌한 모습이었다. 응시생(?) 중에는 김연옥 울산시 문화예술과장과 이 행사를 마련한 전수일 울산문화재단 대표도 섞여 있었다.

“태화루는 원 태화루와 후기 태화루로 나뉘고 장소도 각기 다릅니다. 후기 태화루가 헐릴 때 목재는 학성이씨 월진문회에서 ‘이휴정’을 짓는 데 활용합니다(1940년 이후). ‘태화루’ 현판도 보관하게 되고.” 1시간 30분을 다 채운 신 관장의 강의는 숨 돌릴 틈이 없었다. 그는 결론부터 말했다. “어렵게 건립된 태화루를 제대로 활용해서 문화 창달의 공간으로 거듭나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강의내용 가운데 밑줄 그은 일부만 간추려 싣기로 한다.

‘원(原) 태화루’는 신라 선덕여왕 대에 자장(慈藏) 스님이 당나라를 다녀와서 세운(643년 이후) ‘태화사’와 뿌리를 같이한다. 그러나 ‘태화강 황룡연(현 용금소) 북쪽 바위 위에 지어졌다’는 원 태화루는 임진왜란 무렵 족보를 잃고 만다, 그리고 정확한 위치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 뒤 기록에 나타나는 태화루는 ‘후기(後期) 태화루’를 뜻한다. 대동여지도, ‘경상도읍지 울산부’(1832년)의 태화루 역시 후기 태화루다. 옛 울산초등학교 운동장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신 관장은 강의 중간에 ‘영남 삼루’도 잠시 짚고 넘어갔다. “진주 촉석루와 밀양 영남루, 울산 태화루를 일컫는 ‘영남 삼루’는 사실 기록에는 없고 누군가가 지어낸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영남루의 규모는 태화루에 못 미칩니다. 누각 기둥 수에서부터 차이가 뚜렷합니다.” 태화루에 대한 자부심으로 여겨졌다.

그의 강의 주제어 속에는 태화루를 다녀간 고려조의 성종(981∼997)과 대문장가인 노봉 김극기(1150∼1209), ‘울주 팔경’을 노래해 ‘인문학의 씨앗을 뿌린’ 설곡 정포(1309∼1345)도 등장한다. 신 관장이 말했다. “성종이 태화루에서 연회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어를 드셨다가 그만 배탈이 나서 개경으로 돌아간 얼마 후 3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러면서 1997년을 떠올린 그는 뜻밖의 의미도 부여했다. “성종이 울산을 다녀간(997년) 지 꼭 1천 년 만에 울산이 광역시로 승격한 사실, 여러분 모르셨죠?”

신형석 관장의 타임머신은 2005년으로 되돌아갔다. 2005~6년이라면 ‘로얄예식장’ 자리에 주상복합아파트가 들어선다고 논란이 요란하던 시기다. “평당 1천만 원 계약이 끝났다고 했지만, (당시) 박맹우 시장은 그 자리에 태화루를 짓겠다는 결심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의회에서는 위치 문제도 제기해서 제가 백방으로 뛰어다닌 끝에 찾아낸 것이 <학성지>(=울산의 역사를 처음으로 집대성한 서지, 1749) 필사본입니다. 의원들을 설득시킨 결정적 증거가 되었죠.”

강의를 마친 뒤엔 ‘태화루 삼행시’ 짓기가 이어졌다. 필자도 과거를 보듯 앉은 자리에서 몇 자를 긁적였다. “태: 태화루의 딴 이름/ 화: 화평 즉 평화/ 루: 누대에 이어지리 큰 평화의 울산!” 여섯 명 가운데 두 명이 당첨 행운을 얻었고 필자도 그 하나를 거머쥐었다. 난생처음 ‘나이 덕분에’ 맛본 행운이기도 했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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