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종교지도자의 만남
두 종교지도자의 만남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1.05.03 22: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날 따라 더없이 쾌청한 날씨. 인공연못 물속에 의연한 자태로 드러누운 울산의 국보 두 점의 옻칠 작품도 가지산 쌀바위에서 떠온 듯 청정해 보였다.

4월의 마지막 날 오전, 영축총림 통도사의 장경각 앞마당.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백성 스님(김성수 철새홍보관장)이 천주교 부산교구 소속 김영규(안셀모) 울산대리구장 신부님과 박창현 평신도사도직협의회장을 반갑게 맞는다.

울산에서 온 객은 필자를 합쳐 모두 4명. 목적은 통도사 방장 성파 스님 예방이었지만 먼저 둘러본 것은 스님이 직접 빚은 장경각 내 도자(陶瓷) 경판 1만6천여 점. 장경각 내실은 미로(迷路)의 연속이었다.

백성 스님이 입을 열었다. “여기를 통과하면 팔만대장경 전체를 읽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신심 깊은 불자들이 ‘마니차’를 돌리던 티베트 불교 생각이 났다.

안셀모 신부님은 반구대·천전리 암각화 작품에도 관심이 깊었다. 성파 스님에 대한 예비학습의 연장이었을까. 시계를 보았다. 오전 10시 반. 서둘러 발길을 재촉했으나 토굴에는 스님이 안 계셨다. 수소문에 나섰고, 아차 싶었다. 오전 8시부터 2시간 가까이 기다리다가 자리를 뜨셨다고 했다. ‘일정을 상세히 알려드리지 못한 게 실수였구나.’ 83세의 스님이 코로나 예방백신을 맞는 날인 것도 몰랐고…. 전화로 사과부터 드렸다.

성파 스님의 토굴 안방. 상견례가 시작됐다. 안셀모 신부님이 먼저 예를 갖추었다. “저희가 준비한 다과입니다. 책도 하나 들고 왔습니다.” 다과는 박창현 회장이 솜씨 좋은 신도에게 부탁해서 특별히 마련한 다식(茶食). 책 표지에 눈길이 갔다.<老子 道德經 ?山 解 / 莊子 內篇 ?山 註>

신부님이 설명했다. “중국의 감산 스님이 해석한 노자, 장자에 관한 책입니다. 스님이 그림을 그리시고 옻칠 작업도 하시는데 장자는 미(美)하고 관계가 있으니 도움이 될 것 같았습니다.”

두 종교지도자가 덕담을 주고받았다. “가져오신 것 좀 드시지요.” “예. 스님은 옻칠 작업을 얼마 동안 하셨습니까?” “그리 오래는 못 했습니다.” 신부님이 토굴 한구석에 놓인 그림 병풍을 가리키며 질문을 던졌다. “병풍 그림 저건 옻칠 작품이 아니잖습니까?” “물감은 옻이지요.” “저건 영축산입니까?” “금강산이지요. 종이는 한지고, 한지에 옻칠한 그림이지….”

잠시 자리를 떴던 스님의 손에는 아름다운 옻칠 스카프가 한 움큼. 답례용 스카프는 일행의 목을 일일이 휘감았다. 다음은 옻칠 작품인 찻잔이 한 아름.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토굴 안을 감돌았다. “스님도 중국 다녀오셨지요? 어디에 계셨습디까?” “주로 북경인데, 산수화를 배우고 왔지요.” “저는 대만에서 공부하는 사이 중국에도 1년에 두세 차례는 다녀왔고, 친구도 많았지요.” “나는 중국에 갔다 와도 친구 사귀는 그런 건 통 안 했어요.” (안셀모 신부님은 대만에서 10년간 동양철학을 수학한 중국통이다.)

말 머리는 백신 접종 쪽으로 돌려졌다. “오늘 양산시문화회관에 사람 참 많이 왔대. 800명인데 보통 오래 기다린 게 아니지.” “접종하고 나서도 예후 본다고 오래 기다리셨겠지요?” “꼼짝 말고 있으라 하대.” 차가버섯 차를 따르던 스님이 한 말씀 더 보태신다. “앗다, 어떤 노인 한 분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다면서 고함을 지르는데 ‘퇴장’ 말까지 다 나왔지. 그럴 때는 나도 가만있을 수밖에. 허허.”

시침(時針)이 12시 반을 넘고 있었다. 스님의 공양 시간도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늦어졌다. 얼른 자리를 뜨기로 했다. 스님의 마무리 말씀이 긴 여운을 남겼다. “배가 많이 고프시겠다. 공양하실 시간이 넘었는데, 대접을 못 해서…,”

김정주 논설실장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