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안전장치다-영화 ‘버티고’
사람이 안전장치다-영화 ‘버티고’
  • 이상길
  • 승인 2021.04.29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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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버티고’
영화 ‘버티고’

 

스포일러가 있는 글입니다

어릴 땐 누구나 자기 미래가 반짝반짝 빛날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자기 생각대로 되는 일 따윈 잘 없고 자주 괴롭고 한심하다. 꿈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서 걸작일본영화인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도 이런 명대사로 시작된다. “꿈을 꾸는 건 자유다. 허나 그 꿈을 이뤄 행복한 인생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은 겨우 한 줌 뿐. 그렇지 못한 그 외 사람들은 슬픈 한 숨을 짓거나, 비참하게 술에 찌들거나, 급히 인생을 마치거나, 또는 그냥 웃으며 넘기려 하거나, 아니면 마음이 삐뚤어져 범죄에 뛰어들게 된다. 하지만 어느 쪽으로 가도 앞은 캄캄하기만 하다.” 해서 어른이 되면 삶은 언제부턴가 버티는 것 자체가 위대해진다. 술에 찌드는 것 정도야 그냥 우습다. 일찍 인생을 마치거나 범죄에 뛰어들지 않는 것만으로도 칭찬해줄 일이다.

헌데 <버티고>에서 주인공 서영(천우희)은 그냥 삶의 무게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이 드는데 어지럼증이라는 고질병까지 갖고 있었다. 어렸을 때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귀를 맞은 뒤 문제가 생긴 청력이 어지럼증으로 이어진 것. 지금은 언제 잘릴지 모르는 계약직에 아슬아슬한 사내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이혼 후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엄마(전국향)까지 짐이 되어 자신을 괴롭혔다. 그래서였을까? 고층빌딩의 사무실에서 그녀는 간혹 갑자기 어지럼증이 덮쳐 쓰러지곤 했었다. 그러니까 어지럼증(Vertigo) 속에서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허나 그런데도 상황은 더욱 나빠져만 갔다. 재계약은 점점 힘들어져 가는데도 엄마는 힘들 때마다 자신을 찾아왔다. 그나마 몰래 연애를 하고 있었던 사내 인기남 진수(유태오)가 위안이 됐지만 그것마저 얼마 후 그에 대한 엄청난 비밀이 밝혀지면서 그녀를 결국 빌딩 옥상 끝으로 몰아 부치게 된다. 과연 서영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사실 본 지 꽤 된 영화인데 <버티고>를 다시 소환하게 된 건, 최근 국내를 넘어 세계적으로도 점점 화제가 되어가고 있는 ‘브레이브 걸스(쁘걸)’의 역주행 때문이다. 2017년 ‘롤린’이라는 곡을 시작으로 ‘하이힐’과 ‘운전만해’ 등 명곡들을 연이어 발표했지만 내놓는 족족 외면 받았다. 그래도 무대엔 서고 싶었던 멤버들은 군 위문공연으로 향했고, 돈은 안 됐지만 최선을 다해 노래하고 춤을 췄다. 그게 무려 50여회가 넘었다. 그러면서 비록 군대 밖에서는 잠잠했지만 군인들 사이에서는 군통령으로 군림하며 밀보드(미국 빌보드 차트를 패러디한 밀리터리 차트)를 휩쓸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가 시작되면서 군 무대마저 설 수가 없게 되자 멤버들은 결국 올해 초 해체를 결심하게 된다. 그게 2월 23일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 유명 유튜버가 그녀들의 군 위문공연 영상을 편집해 만든 영상이 유튜브 알고리즘을 타고 번지기 시작한 것. 이른바 ‘롤린’ 역주행이 시작됐고, 얼마 뒤 쁘걸은 국내 모든 음원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며 시쳇말로 ‘퍼펙트 올킬’을 달성하게 된다. 그리고 누가 들어도 좋은 ‘롤린’이라는 곡과 함께 그녀들의 역주행 과정이 국외에도 알려지면서 지금은 밀보드에서 진짜 빌보드로 향하고 있다.

이런 그녀들의 감동적인 스토리를 접하면서 세상은 쁘걸이 버텼기 때문에 지금의 영광을 누리게 된 거라고 말들을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까놓고 말해 쁘걸이 끝까지 버틴 건 아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그룹 해체라는 결정을 내렸는데 운 좋게 그 다음날 역주행이 시작되면서 지금의 전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포기한 순간 한 유명 유튜버가 손을 잡아줬기 때문에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거다.

공교롭게도 <버티고>의 결말도 이와 같다. 어지럼증 속에서 고층빌딩 난간에 선 서영은 결국 삶을 포기하지만 관우(정재광)라는 남자가 그녀의 손을 잡아주면서 삶을 이어가게 된다. 관우는 빌딩 청소부로 늘 고층건물 밖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그에겐 안전장치가 있었고, 그 안전장치가 모든 걸 포기해버린 서영을 잡아주게 된다. 삶이란 게 그렇다. 늘 사람 때문에 힘이 들지만 사람 때문에 다시 살게 된다. 사람이 안전장치다. 우리 쁘걸도 사람 때문에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것. 그러거나 말거나 얘들아! 울산 한번 안 올래?! 2019년 10월 16일 개봉. 러닝타임 114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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