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의 진가
‘-판’의 진가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1.04.18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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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접미어 ‘-판’이 한창 진가(眞價)를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이 접미어는 두 가지 아쉬움을 남긴다. ‘-판’이 붙는 낱말치고 고상한 뜻이 드물다는 점이 그 하나요, 국어사전이든 인터넷 사전이든 정확한 뜻풀이를 찾기 힘들다는 점이 다른 하나다. ‘판’을 ‘판때기(=’판자’의 속된말)’라는 뜻의 ‘板’이라고 콕 집어내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저 ‘일이 벌어지는 자리’ 또는 ‘어떤 일이 진행되는 분야’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판’이 빚어내는 낱말 중에는 흥미로운 것들이 비교적 많다. ‘이판사판’에, 한술 더 뜬 ‘이판사판공사판’에, ‘개판’ ‘쑥새기판’에다 ‘아사리판’까지…. 여기서 ‘개’ 빼고는 ‘-판’ 앞에 오는 낱말 다수가 불교(佛敎)와 유관하다. 인터넷을 뒤져보고 불자(佛子)의 귀띔도 들어본 결과다.

‘사리에 어긋나거나 질서가 없는 판국을 속되게 이르는 말’. ‘이판사판’에 대한 제법 그럴듯한 뜻풀이다. 혹자는 이런 풀이로 귀를 솔깃하게 만든다. “마지막 궁지에 몰린 상황을 말하는 ‘이판사판’은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의 합성어다. 이판은 참선·경전 공부·포교 등 불교의 교리를 연구하는 스님이고, 사판은 절의 산림(山林·産林=재산 관리·살림살이)을 맡은 스님이다.” 한말(韓末)의 국학자 이능화(李能和)가 쓴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하권 「이판사판사찰내정」에서 인용했다는 그는 이판승(理判僧)은 속칭 ‘공부승(工夫僧)’, 사판승(事判僧)은 속칭 ‘산림승(山林僧)’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정치도 그렇지만 말은 생물(生物)이고, 말하는 이에 따라 뜻이 와전(訛傳)되는 것은 상식이다. 개신교 성결교단 ‘예수정교회’의 정삼열 목사는 ‘이판사판공사판(理判事判工事板)’이란 글(2015.9.9)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기독교대한성결교단은 아니겠지만 요즘 세대는 한마디로 ‘이판사판공사판을 방불케 한다. 이판과 사판이 싸우면 결국 다 망하게끔 되어있다. 지금까진 한국 교계에 가장 복음적이라 인식되었던 성결교단이 어쩌다 이 모양이 되어 가는지 알 수가 없다.”

공사판이 ‘工事板’이 아닌 ‘供辭判’이라는 견해도 있다. 오황균 청주·충북환경연합 상임대표의 ‘이판사판 공사판’이란 제목의 칼럼(2019.12.12.)에서 엿볼 수 있다. “어려운 말로 ‘이판사판공사판(吏判事判供辭判)’이라는 말이 있다.…여럿이 모여 중요한 결정을 하는 일을 ‘대중공사(大衆供辭)’라 하는데 이를 줄여 ‘공사(供辭)’라 한다. ‘이판’과 ‘사판’ 스님들이 모여 ‘대중공사’를 하면 ‘이판사판공사판(吏判事判供辭判)’이 되니 이를 줄여 ‘이판사판(吏判事判)’이라 하고, 이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상황을 표현하는 말이다.”

4·7 재보선을 압승으로 이끈 뒤 산승(山僧)처럼 홀연히 하산(下山)한 김종인 전(前)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한마디 했다가 ‘정치적 망발’ 소리까지 들은 ‘아사리판’의 ‘아사리’도 실은 불교 용어란 설(說)이 있다. ‘靑山 노승렬’ 님은 ‘아사리판의 어원’이란 글(2013.3.14)에서 ‘아사리판(阿?梨判)’을 ‘질서 없이 어지러운 곳이나 그러한 상태’라며 사전에 나와 있는 ‘아사리’라는 말은 ‘제자를 가르치고 제자의 행위를 바르게 지도하여 그 모범이 되는 승려’라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몇 가지 설을 나열한 뒤 모두 유래가 정확하지 않아서 ‘아사리판’의 어원(語源)은 분명치 않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밖에도 귀에 익은 말 중에는 불교 용어에 뿌리를 둔 말이 적잖아 보인다. ‘野壇法席’(=야외에서 펼치는 설법 강좌)이 원뿌리인 ‘야단법석’(=여러 사람이 몹시 떠들썩하고 소란스럽게 법석을 떠는 상태)도 좋은 본보기의 하나일 것이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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