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나무 심은 까닭
닥나무 심은 까닭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1.04.11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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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반열에 오른 양산 통도사의 서운암(瑞雲庵)을 최근 3주 사이 2차례 다녀왔다. 통도사 방장 성파(性坡) 스님을 만나 뵙고 여쭐 게 있어서였다. 스님 특유의 옻칠 기법으로 근 3년에 걸쳐 완성한 울산의 국보급 바위그림 2점(반구대·천전리 암각화)이 언제쯤 대중에게 선보이게 될지 그것이 궁금하던 참이었다.

매번 예방할 때마다 느낌이 그랬지만 지난달 19일에도 놀라운 광경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장 스님의 토굴(=스님의 거처) 근처 연못 아래 벌판에 심어진 30년생(?) 감나무 수백 그루가 소형 중장비에 밀려 잘려나가고 있었던 것.

그 속사정이 궁금했다. 벌목작업 현장에서 연락을 받고 토굴로 돌아오신 여든셋 노스님이 말문을 열었다. 감나무를 잘라낸 것은 닥나무를 심기 위한 예비작업이라는 것. ‘생(生)과 사(死)가 그렇게 허무하게 갈리게 되는 건가.’ 허튼 잡념도 잠시, 그제야 깨달음이 와 닿았다. 들어올 때 토굴 안마당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국내 최대’라는 100미터짜리 한지 두루마리가 생각났다. 아하, 그렇게 깊은 뜻이 있는 줄도 모르고….

닥나무[楮]라면 뽕나뭇과에 속한 갈잎떨기나무로, 열매는 약재로, 껍질은 한지 재료로 쓰인다. 스님이 새롭게 추구하신 것은 다름 아닌 한지(韓紙)였던 것. “김 실장도 알다시피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 유물 보존용으로 한·중·일 3국의 전통 종이 중에서 최종 선택한 것이 중국 종이도 일본 종이도 아니고 우리나라의 ‘고려 한지’였지. 그걸 되살리고 싶은 거라네.”

그러고 나서 3주 뒤인 지난 9일 서운암 토굴을 다시 찾았다. 이번엔 예고도 없이 불쑥 들이닥쳤다. 성파 스님은 마침 노성환 울산대 명예교수의 다(茶)문화 강좌를 듣고 계셨다. 따지고 보면 스님의 공부시간을 억지로 축낸 셈이 되었지만 그래도 스님은 인자한 모습을 잃지 않으셨다. 돌아오는 길에 일행 한 분이 소감을 말했다. “우리 불교계에선 드물게 성불(成佛)하신 분입디다.”

스님께 자초지종을 여쭈었다. 닥나무는 대부분 1년생이고 약 3천 평의 땅에 옮겨 심은 숫자가 좋이 1천600 그루는 될 거라고 하셨다. 경주 등 외지에 수소문해서 구해왔고, 껍질을 벗겨 한지를 만들려면 2년은 더 기다려야 할 거라는 말도 들려주셨다. 감나무를 베어낸 벌판에는 윗부분을 일부러 잘라낸 닥나무 묘목들이 봄비 속에서 수줍은 듯 목을 축이고 있었다.

다음 목적지는 성파 스님의 불심(佛心)으로 가득 찬 서운암 경내 장경각(藏經閣) 앞마당. 3주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두 바위그림을 한동안 수장(水藏)하게 될 2개의 시멘트 연못이 물로 채워져 있었다는 것, 예닐곱 겹 삼베를 덧씌우고 수없이 옻칠을 한 두 바위그림은 오는 24일 이곳에서 첫선을 보일 예정.

두어 달 전 이 소식을 듣고 성파 스님을 예방했다는 송철호 울산시장은 두 작품의 울산 소장·전시 의향을 타진했다가 확답은 받지 못한 상황. 하지만 스님은 필자의 거듭된 질문에 환한 웃음으로 답을 대신하시는 듯했다. ‘울산시가 하기 나름’이란 귀엣말이라면 지나친 아전인수일까?

측근들의 말을 빌리면 유명세를 탄 지 오래인 ‘서운암 된장’도 숫자가 1만6천여 장을 헤아린다는 ‘장경각 도자(陶磁) 경판’도 어느 하나 스님의 입김과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다. 토굴에서 들려주시던 스님의 말씀이 귓전을 스쳤다.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은 불경이 목판 양쪽으로 새겨져 있지만 우리 장경각 도자 경판은 한쪽으로만 새길 수밖에 없어 개수가 그만큼 늘어난 거지.” 멀게만 보이던 영취산의 능선이 이날 따라 아주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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