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牧民心書) < 자산어보(玆山魚譜)-영화 ‘자산어보’
목민심서(牧民心書) < 자산어보(玆山魚譜)-영화 ‘자산어보’
  • 이상길
  • 승인 2021.04.08 22:2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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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자산어보'의 한 장면.
영화 '자산어보'의 한 장면.

 

학창 시절 역사 시간에 배웠던 실학(實學)에서 ‘정약용’은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조선 후기, 그러니까 17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융성했던 실학은 실사구시(實事求是:사실에 입각해 진리를 탐구하는 태도)를 중시하며 고달픈 백성들의 삶을 챙기려 했었다.

당시 사회의 주류였던 성리학(性理學)이 공리공론(空理空論:헛된 이치와 논의)에만 치우쳐 백성들의 삶을 외면하자 그에 대한 비판으로 비롯된 셈이다. 그리고 그런 실학을 이끌었던 학자들로는 앞서 언급한 정약용을 비롯해 이익,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등이 있다. 시험에서 안 틀리려고 악착같이 외웠던 인물들인데 이들 실학자들이 집필한 책 가운데는 단연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가 가장 유명하다.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면 요순(중국의 태평성세 시기)의 법이라도 실시할 곳이 없다”라는 취지에서 지어진 이 책은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다시 말해 지방관이 부임한 후부터 그가 관직을 내려놓을 때까지 백성을 위해 마땅히 실천해야 할 내용들을 담은 일종의 지침서다.

그런데 지금도 또렷이 기억이 나는데 당시 외웠던 실학서적 가운데는 정약용의 친형인 정약전이 지은 ‘자산어보(玆山魚譜)’라는 책도 있었다. 흑산도 근해의 수산동식물 155종의 명칭이나 분포, 형태, 습성 및 이용 등에 대한 내용이 담긴 책인데 처음 외울 때는 “뜬금없이 양반이 뭔 물고기야”라는 식으로 비웃듯 넘겼더랬다. 그래도 ‘공자 왈 맹자 왈’하던 시절에 어류사전을 집필했다는 게 다소 신선하게 다가오긴 했었다. 그랬다가 30여년 뒤 이준익 감독에 의해 영화로 탄생한 <자산어보>를 보고는 그때 그 신선함의 실체를 제대로 알게 됐다.

영화 <자산어보>는 실제 정약전이 집필한 자산어보의 서문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영화 속 창대(변요한)는 서문에도 실제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러니까 1801년 신유박해(천주교도를 박해한 사건)로 흑산도로 유배를 온 정약전은 가난한 어부면서도 학구열이 넘치는 장창대라는 청년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흑산도 근해의 어족을 탐구해 ‘자산어보’를 남기게 됐는데 영화는 그 과정에서 상상력을 가미해 실학자인 정약전(설경구)과 성리학을 고집하는 창대를 대립구도로 몰고 가면서 깊이 있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영화 속에서 창대가 말한다.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진 건 성리학이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당시 백성들은 부패한 관리들의 말도 안 되는 세금 폭탄에 신음하고 있었고, 창대는 성리학을 바로 세워 그들을 구하고자 했다. 반면 고위 관직에 있다 흑산도로 유배를 온 약전은 그게 어렵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다. 천주교를 비롯한 다른 문화는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리학은 배포가 작았고, 돈과 권력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컸던 것. 어차피 바뀔 수 없는 세상이라는 걸 알았기에 그는 물고기를 들여다보게 됐던 거다.

그 즈음 영화는 역시나 신유박해로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온 동생 정약용(류승룡)과의 관계를 조명하는데 아직도 현실 정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약용은 유배지에서 목민심서를 비롯해 경세유표, 흠흠신서같은 인간세상의 질서와 도를 바로잡는 여러 권의 책을 써냈다. 허나 그럼 뭐하나. 세상이 달라진 건 없었는데. 그래도 자산어보는 어부들이 먹고 사는 문제에 보탬이라도 됐지.

하지만 이 영화가 자산어보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런 실용적인 면에만 머물지 않는다. 자산어보의 진정한 가치는 다른 서적들이 온통 인간의 도리 같은 인간세상의 질서에 대해서만 논할 때 물고기들의 세계, 즉 다른 세계를 보고 인정할 줄 아는 포용력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게 일찍부터 내겐 신선했던 거였다. 실제로 약전이 자산어보를 집필하기 시작한 계기는 창대의 이 말 때문이었다. “물고기를 알아야 물고기를 잡응께요. 홍어 댕기는 길은 홍어가 알고, 가오리 댕기는 길은 가오리가 앙께요.”

하지만 대다수 인간들은 아직도 홍어나 가오리에게도 다니는 길이 있다는 생각은 잘 하지 않는다. 그들의 존재이유란 그저 인간의 먹잇감일 뿐이라고 여긴다. 그치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영화 속 약전의 생각도 비슷하던데 우리가 그들을 잡아먹을 권리 따윈 애당초에 없다고 본다. 그냥 우리가 지금 이 지구상에서 가장 힘이 센 종족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뿐. 만약 우리보다 더 힘이 센 외계 종족이 침략하는 날엔 그것도 끝이라고. 2021년 3월 31일. 러닝타임 126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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